사교육 반대론자 엄마의 학원 체험기 (3)
사교육 반대론자로서 아이를 학원에 보낸 지 한 해가 되었다. 겨울이 오면서 학원에 갈 시간이면 제법 어둑어둑해져서 더 피곤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우리 방학 때는 학원도 좀 쉬면서 신나게 지내볼까?" 하는 엄마의 달콤한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아이는 "나는 과학 학원이 좋아. 계속 다닐 거야!" 하며 비장한 표정으로 노란 가방을 둘러메고 학원 차에 오른다.
아이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키우기로 소문이 난 집에서 유일하게 허용하는 사교육이다 보니 주변에서도 관심이 높은 편이다. 태권도, 피아노, 미술, 영어 학원 다니는 친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과학'을 선택한 아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엄마가 짜 준 시간표대로 여러 학원을 전전하는 친구들은 학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봄이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봄이는 학원이 재미있대요. 나는 하나도 재미 없던데.", "엄마, 나도 봄이 다니는 과학 학원 가보고 싶어요!". 엄마들의 관심이 쏟아질 법도 하다.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 하나의 주제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탐구하는 실험 위주의 교육. 빨리 더 높은 레벨의 반으로 올려 보내야겠다든지, 문제 풀이 능력을 심어줄만한 곳을 찾아봐야겠다든지, 좀 더 실험다운 실험을 해야겠다든지 하는 욕심은 없다. 엄마의 마음이 그러하니 아이 또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고 '놀이처럼' 과학을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겠지.
2학기 말쯤 접어드니 단원 평가라는 게 시작됐다. 두 달에 한 번, 그간 실험하고 배운 내용들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필기시험과 실험, 발표로 진행된다는데, 그저 '재미'를 위해 놀이처럼 학원을 보내는 내 입장에서는 영 마뜩잖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슬슬 학습을 위한 학습이 시작되나 싶어 학원을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나 다행인지 아이는 '시험'이란 말의 무게를 알아가기 시작한 학생이 되었음에도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첫 평가를 앞둔 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괜찮아. 나 그동안 배운 거 다 기억하는 것 같아. 그냥 한 번 해볼게!" 지나치게 당당한 아이의 모습에 어쩐지 나도 평소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 그대로 학원에 들여보냈다.
"엄마! 나 시험 다 맞았어! 그리고 내가 아주 특별한 발표를 했지!"
다음 날 선생님께서 전화로 시험 결과를 알려주셨다. "어머니, 봄이가 발표를 정말 너무 잘했어요. 추론 과정을 발표하는 데 스스로 앞에 나와서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리면서 설명하더라고요. 제가 참 많은 아이들과 수업을 해 봤는데 이렇게 발표하는 건 정말 처음이었어요!"
좋아서 하는 일의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억지로 엄마가 앉혀둔 학원이 아니라 자기가 배우고 싶은 것을 스스로 찾아간 곳이니 그 시간에 배우는 것들이 재미있고 인상 깊게 새겨지는 것, 그리고 '정답'을 말하고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한다는 부담이 없으니 자유롭게 '내 방법대로' 생각하고 소개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 '시험'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내가 배우고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시험해보자고 생각하는 정도의 여유로운 마음가짐.
아이는 여전히 문제에서 '요구하는' 답은 아니지만 '정답이 아닌 것도 아닌' 자기만의 답들을 써 내려간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동안 한 번이라도 다루고 배웠던 내용들은 잘 기억하고 있고, "왜 그럴까?", "어떻게 하면 될까?"를 생각해보는 힘이 많이 길러진 것 같다. 그게 여덟 살의 과학적 사고의 전부가 아닐까.
새해가 되면서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을 무사히 마치며 긴긴 겨울방학에 들어섰고, 과학 학원에서는 새로운 빛깔의 교재를 받아왔다. 아이가 언제까지 과학을 놀이처럼 학원을 재미있게 여기며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잘한다'는 느낌이 드는 지금, 나는 스스로를 조용히 다잡는다. 언제든 아이가 이걸 부담스러워하거나 흥미가 떨어져 보인다면 '아깝다'는 생각하지 말고 언제든 그만두게 해 주자고.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왜 더 빨리 높은 레벨의 반으로 진급을 못할까, 이제는 좀 더 심화된 내용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과목도 준비시켜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 따위 품지 말자고.
아이를 '학년'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엄마들의 조급증이 시작된다. 이맘때 가장 많이 들리는 단어는 '예비 0학년', 다가올 날들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지 않은' 날을 '앞서 가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을 막연히 희생시켜야 하는 것 또한 분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건 언제까지나 '지금 이 순간'일뿐이니까. 여덟 살, 아홉 살, 열 살... '학년'을 잠시 떼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나이는 얼마나 작고 여리고 어리고 소중한지, 아직은 '학생'이기보다는 '어린이'인 아이들이 아이답게 하루하루를 그저 즐겁고 신나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논다. 아이가 만들고 싶다던 서커스 기차 모형을 함께 조립하고, 재활용 상자를 이리저리 오려서 스티로폼 공으로 만든 눈사람이 사는 겨울나라를 만들고, 달큰하고 고소한 냄새가 온 집안에 피어오르도록 쿠키를 굽는다. 조금 덜 추운 날엔 야트막한 동네 겨울산에 뛰어오르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놀이터로 달려 나가 그네 줄을 잡은 손이 새빨개지도록 놀다 온다. 늦잠 자고 싶은 날이면 서로 꽁꽁 안은 채로 침대에서 한나절 뒹굴거리다가 꺄르르 배가 아플 때까지 서로를 간지럼 태우며 웃고. 방학이란 무릇 이런 거니까. 여덟 살에서 아홉 살이 된 1월,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아이에게 온통 즐겁고 행복한 기분으로만 가득 차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