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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Sep 13. 2024

아무도 추모하지 않는 죽음

모든 것이 사라질 거야, 당신이 할아버지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2024년 9월 13일

이제 몇 해째인지 쉬이 헤아려지지도 않는 그날이 돌아왔다. 아빠의 기일이다. 스무 해가 지나고부터는 더더욱 그러한 것 같다. 사실 이제 함께 살았던 날보다 그렇지 않았던 날들이 더 길어졌고, 나는 그 시절 엄마 아빠의 나이에 닿아있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처럼 희미해져만 가는 기억들은 붙잡으려 해도 바짝 마른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 내린다.


몇 달 전, 엄마에게 조심스레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참 오랜 세월 외면하고 있었던 존재가 그 생을 다하셨다는 소식,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들과 정말 오랜 세월만에 마주해야 하는 자리. 나는 결국 그 자리에 가지 않았고, 혼자 할머니의 빈소를 찾은 엄마는 사흘간 그곳을 지키다 돌아왔다. 이웃집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아니 그저 등이 굽고 주름진 얼굴의 시장 할머니들만 보아도 마음이 물컹해지는 나는 왜 이 죽음에 대해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걸까. 문득 서글퍼졌다.


내가 태어나면서 이미 '할머니'라는 존재가 된 그녀 또한 누군가의 귀하디 귀한 딸이었을 거고, 꿈 많은 소녀였을 거고, 수줍은 새댁이었겠지. 첫아들 -훗날 나의 아빠가 될-을 품에 안고 금지옥엽 돌보며 키웠을 테고, 아직 한창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자식을 바라보며 애간장이 끊어졌겠지. 공감하고 경청하고 다정하게 표현하는 것들 배우지 못한 시절이었기에 그저 그렇게 자기 몫을 살아온 저 시골마을 필부였겠지.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시 돋친 말들보다 어쩌면 더 많은 다정한 말들이 그 시절 속엔 평범하고 당연하게 부유했겠지.


한 시대가 저물었다. 다 끊어진 밧줄 사이 위태롭게 버티던 마지막 실타래 하나가 톡 하고 끊어지듯, 그녀와 나의 연이, 그의 가족들과 나의 연이, 완벽하게 끊어지고 마침표를 찍었다. 내가 알지 못할 평범한 일상들과 질곡의 세월이 많았을 그녀의 세계가 사라졌다. 첫 손녀라고, 아들이 아니라 아쉽다는 걸 굳이 많은 말로 쏟아댔지만 그래도 제 자식의 자식이니 또 언젠가는 사랑하고 귀여워했을 그 손녀에게도 추모받지 못한 채, 한 인생이 저물었다.


얼마 전 이런 내용의 글을 보았다. '당신의 삶이 끝나면, 가까운 몇몇은 한동안 슬퍼하겠지만 이내 일상을 회복할 거고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끝내는 당신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어디서도 당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것이며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할아버지의 아버지를 알지 못하듯이.'


할아버지의 아버지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 사람이 죽는다는 건 그 세계의 끝을 의미한다. 가까운 사람들은 얼마간의 균열을 피할 수 없겠지만, 저마다의 일상이 그 위로 쌓이고 덮이며 회복하고 무뎌지고 잊어갈 것이고, 그보다 가깝지 않았던 사람들은 단 며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갈 것이다. 굳이 그 삶이 끝난 날에야 '마치 한 번도 잊은 적 없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짓는 일도 무의미해지고, 이미 오래전 흙처럼 돌아간 몸의 재가 담겨있는 곳에 가본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뿐이다.


아빠가 떠나고 단 한 번도 어떠한 의식을 치르거나 티 내지 않고 살았던 수많은 오늘,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나에게 피와 살을 내주었고 영과 혼을 보듬어 주었던 내 아버지를 홀로 가만히 추억해 본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를. 끝내는 화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한 채, 아니 묵은 감정을 완벽히 떨쳐내지 못한 채 냉랭하고 무심하게 떠나보낸 할머니를.



젊은, 아니, 아직 어린 나의 아빠. 그리고 그 품속에 안겨있는 나. 영원할 것만 같은 순간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쏜살같이 흘러가고 흩어지고 사라진다. 오늘 이 순간이 소중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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