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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Oct 15. 2021

비를 품고 자란 아이

가을비를 맞으며


하루 종일 어둑어둑한 날씨가 이어진다. 가을장마인지 어째 여름보다 비가 더 자주, 많이 내리는 것 같다. 조그마한 화분들을 번갈아 베란다 걸이대에 내어놓고 빗물을 먹인다. 가느다란 덩굴줄기 손톱만 한 이파리에 또르르 통통통 반짝이는 구슬이 맺힌다. 휘익 불어오는 바람에 배시시 몸을 꼬며 춤을 추는 나무들이 초록빛 행복을 뿜어댄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난 비 오는 날이 좋았다. 쨍쨍한 햇살이 내리쬐는 날은 어쩐지 인상이 찌푸려지지만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방울, 쏴아쏴아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보는 것도 맞는 것도 마음이 편했달까. 옅은 구름이 감싸 안은 잿빛 산세는 수묵화처럼 고요하고 발끝에 채이는 빗물은 수채화처럼 경쾌하다. 비를 좋아하던 아이는 마음속에 비를 품고 자랐다. 손에 우산을 들고서도 친구와 함께 비를 쫄딱 맞으며 꺄르르 웃는 소녀가 되었고, 비 소식이 들리면 하염없이 창 밖을 내다보며 기다리는 어른이 되었다.



“아, 날씨 너무 좋다.” 너른 창밖으로 펼쳐진 잿빛 하늘을 보며 한숨처럼 감탄이 쏟아져 나온다. 아이에게 노란 비옷을 입히고 남편을 채근해 밖으로 나간다. 첨벙첨벙 찰방찰방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빗방울을 온몸으로 만지며 아이의 마음에도 비를 심는다. 신이 난 아이는 이리 폴짝 저리 폴짝 뛰어다니다 콩 하고 물 웅덩이를 세차게 밟는다. 구불구불 땅 위로 기어 나온 지렁이를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본다. 우산 밖으로 스윽 내민 손바닥에 토독토독 찬 기운이 떨어진다. 아이야 기억하렴, 이게 비란다. 마음속에 담아두고 메마른 곳 보이거든 넉넉하게 내어주렴.



어쩐지 쓸쓸한 듯 뭉클한 마음이 비처럼 스며든다. 나무와 풀과 꽃을 쑤욱쑥 자라게 하는 비가 우리도 쑥쑥 자라게 한 걸까.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젖은 발끝이 슬그머니 시려온다. 생명의 싹을 틔우고 나를 자라게 한 비가 다음 계절을 몰고 온다. 나는 어떤 꽃을 피웠을까. 우린 어떤 열매를 맺게 될까. 나의 너는 어떤 잎을 가졌을까. 우린 어떤 생명을 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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