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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제나봄 Sep 13. 2021

그 해 가을

어쩌면 나의,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


강산이 두 번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기가 막히게도 매년 이 날에는 항상 눈이 시리도록 새파랗고 맑은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진다. 9월 13일, 오늘은 스무 번째 아빠의 기일이다.                 




20010913     


수능을 두 달 앞둔 고3 교실 맨 뒷자리. 머릿속엔 온통 이 지루한 수업이 끝나면 매점으로 달려가 저 뱃속까지 짜르르하게 속을 달래 줄 초록색 사이다 캔 하나를 청량하게 딸 생각만 하며 앉아있던 아침, 지금이 수업 중인 걸 모를 리 없는 엄마가 자꾸만 전화를 한다. “아직 수업 중, 이따 전화할게! 책상 밑에 숨어들어 속삭이듯 전화를 끊었지만, 그로부터 다섯 번은 더 울리던 전화. 그땐 왜 몰랐을까, 세상엔 그토록 다급하게 전하고 싶은, 아니 전해야만 하는 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선아… 아빠가 쓰러졌대. 그런데 아빠가 숨을 안 쉰대. 아빠가… 죽었대…….”      


이게 무슨 삼류 소설 같은 이야기인지. 말도 안 된다. 우리 아빠는 엄청 크고 강하고 튼튼한 사람인데? 우리 몇 시간 전에도 바다 건너 시차 건너 통화했잖아. 아빠답지 않게 나한테 시답지 않은 일상 얘기도 막 하고 그랬는데. 무릎이 맥없이 꺾여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배꼽 근처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온 눈물이 괴성과 함께 토하듯 쏟아졌다.          


아침 보충수업을 막 마친 시간이라 교문까지 걸어오는 동안 교정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새파랗고 햇살은 그렇게 맑고 밝을 수가 없었다. 아빠가 우리가 보고 싶어 왔다며 갑자기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나타났던 5월의 그 날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날씨였다. 그날도 이렇게 아무도 없는 교정을 신나게 달려서 내려갔었는데.     


5월과 9월의 걸음을 번갈아 내디디며 집에 도착해 보니 넋이 나간 엄마는 혼자서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놓고 옷장에 있던 옷을 마구 집어넣고 있었다.         

       

“아빠한테 가야 해. 빨리 아빠한테 가야 해.”     

           

와르르 무너져 내린 엄마를 맞닥뜨린 순간, 나는 달려가서 안아줄 수 없었다. 화장실로 문을 쾅 닫고 들어가 찬물을 콸콸콸 틀어 놓고 세수를 하며 되뇌었다. 울지 말자, 정신 차리자, 난 안 울 거야, 절대로 울지 않겠어. 거울 속에는 억지로 눈을 부릅뜨느라 벌게진 얼굴의 열아홉 살, 내가 있었다.         


                                     

그래도 비행은 설레더라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복작복작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빠 회사에선 가족들의 여권을 급히 받아가 급행 비자를 신청하고 비행기를 예약해주었고, 멀리 살던 이모들이 외할머니를 모시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축축하게 젖은 한숨과 소란스런 통곡이 집안을 가득 메웠다. 매일이 신혼 같고 매일이 파티 같았던 우리 집인데, 모두가 남부러울 게 없는 가족이라며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었는데, 말이 안 된다. 이건 무언가 잘못된 거다. 꿈일 거야. 이건 아주 나쁜 꿈일 거야. 다들 울고 있는데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 아닐 거니까.         

      

목사님이 조심스레 나를 부르셨다. 엄마는 지금 많이 힘드실 테니 네가 중심을 잘 잡고 침착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장례식장과 화장장을 예약하고 영정 사진을 준비해야 하고 교회에서 도울 수 있는 장례 절차들은 이런 이런 것들이 있다고. 어깨를 다독여주시는 목사님께 얼굴 근육을 한껏 당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당장 입고 있을 검정 옷이 필요해 집을 나섰다. 동생에게 가져다 줄 검은 양복과 며칠간 내가 입을 만한 검은 정장을 샀다. 바지가 좋을지 치마가 좋을지 탈의실을 들락거렸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점원의 잘 어울린다는 칭찬에 또다시 얼굴 근육을 한껏 당겨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밤이 어떻게 지났을까, 새벽같이 공항으로 나가 첫 비행기에 올랐다. 생애 두 번째 비행, 처음과 똑같이 아빠가 계시던 곳으로 향하는 그 하늘길. 정말 기가 막히는 건 오랜만에 만난 사촌오빠가 그렇게 반가웠고, 차디찬 기내식도 맛있었고, 창 밖으로 구름을 구경하는 것도 설레더라. 소풍 가듯, 여행하듯, 한 시간 남짓의 짧은 비행이 그저 아쉬울 만큼.                


저 멀리, 공항 게이트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잰걸음으로 일행을 앞질러 동생에게 다가갔다.                 


“준아, 누나랑 약속해. 엄마 앞에선 우리 울지 말자.”

“안 울어. 뭘 울어.”                


심드렁한 녀석, 세 살이나 어린 게 나보다 훌쩍 커져 있었다. 너무도 의젓한 모습으로.               


          

깨어날 수 없는 꿈           

         

차창 밖으로 회색빛 황톳빛 쓸쓸한 풍경들이 이어진다. 볼 만한 곳도 갈 만한 곳도 별로 없는 공장 많은 회색 도시, 중국 톈진. 우직하고 말 수가 적었던 아빠가 엄마와 나에게 ‘외롭다, 보고 싶다, 그립다’ 수 없이 표현하게 했던 이 곳…  쿵, 쿵쾅, 쿵,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티 나지 않게 숨을 몰아쉬지만 좀처럼 폐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아빠의 심장도 이렇게 멎은 걸까. 그래도 설마 산소호흡기라도 달고 계시겠지, 어쩌면 그렇게 보고 싶었던 우리가 달려와서 극적으로 눈을 번쩍 뜨실지도 몰라. 부질없지만 간절하게 이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의식적으로 숨을 몰아쉬던 그때, 금빛 붉은빛이 어지럽게 어우러진 알록달록 화환들이 저 멀리까지 늘어선 길에 도착했다. 병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가운데, 아빠가 누워있었다.              

 

아빠한테 참 잘 어울리던 감색 양복 푸른 셔츠 붉은 타이, 편안하게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모은 채 누워있던,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그 손에 가만히 손을 포개고 서서 바라보았다. 마담투소 같은 밀랍인형 박물관이 흔치도 않던 시절, 그저 정교하게 만들어진 마네킹 같았던 그 모습을. 이렇게까지 맞닥뜨렸는데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일어나 “우리 딸 왔어?” 하며 꼭 안아줄 것 같은데, 내가 눈을 감고 ‘하나님, 일으켜주세요.’ 외치면 죽었다가 살아난 성경 속 인물들처럼 벌떡 일어날 것만 같은데, 마음속으로조차 한 마디도 뗄 수가 없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깨어날 수 없겠구나, 이게 정말 내 삶에 일어난 일이구나.     

      

그래도 아빠 표정이 편안해 보여서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보는 아빠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게 아니라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아빠는 편안히 좋은 곳으로 가신 거겠지? 어쩌면 여기 어디선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나? 그래도 아빠가 잘 살아오셨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애통해하며 존경했노라고 말하는구나. 입 밖으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고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공허한 시공간에 둥둥 뜬 채로 가까스로 침묵 속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아빠, 잘 가요… 나 잘 지낼게요.’                                 



저는 괜찮아요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진 태극기에 덮인 기다란 나무 상자가 비행기에서 구급차로 옮겨간다. 이미 며칠을 조문객들 사이에서 보냈는데 다시 처음부터, 한국에서의 장례가 시작되었다.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꼭 쥐어본다. 한껏 당긴 볼 근육이 파르르 떨린다.               


연신 눈물을 쏟아내며 벌게진 얼굴로 몰려드는 사람들, 몇 번을 반복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던 계속되는 장례 의식과 예배들, 그때마다 나는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처럼 생기가 빠져나가버린 엄마를 대신해 담담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저는 괜찮아요. 부모님 떠나보내는 건 누구나 결국은 겪어야만 할 일인데 제가 좀 일찍 겪었을 뿐이죠, 뭐. 씩씩하게 잘 살 테니 지켜봐 주세요.”            

       

감사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수능이 두 달도 남지 않은 금쪽같은 시간에 사흘 내내 빈소를 찾아 함께 밤을 지새워준 친구들이, 아빠는 정말 멋지고 존경스러운 분이었다며 바깥에서의 모습을 전해주던 사람들이, 엄마가 완전히 바스러지지 않도록 든든하게 곁을 지켜주던 이모들이. 갑작스럽게 심장이 멎을 걸 미리 알기라도 했듯이 평소 말이 없던 아빠가 그 늦은 밤에 전화를 걸어 긴긴 이야기를 나누어준 것이, 병약하고 노쇠해진 모습도 처참하게 사고를 당한 모습도 아닌, 그저 편안하게 깊은 잠을 자듯 누워있던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감사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을까, 나는 끝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이 좁고 깊은 우물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햇빛조차 내려앉지 못해 사방이 어두컴컴한 우물 속. 그런데 참 따뜻하고 평안했다. 굳이 저 위로 올라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을 만큼. 몸을 웅크리고 가만히 엎드렸다. 따뜻한 위로와 감사의 마음이 폭신한 이불처럼 등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영원히 아물지 못할 상처                  

  

“오메! 내가 옆에나 있었으면 발이라도 따 보고 인공호흡이라도 한 번 해봤을 텐데. 이게 무슨 일이고! 내 아들 살려내라, 내 아들!”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던 평안한 정적을 와장창 깨뜨리는 목소리, 할머니다.      


애써 담담한 척 버티고 있던 준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네가 아빠 옆에서 자면서 물이라도 마시든 소변이라도 보러 나왔으면, 그래서 좀 빨리 발견하고 어떻게라도 해봤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아이의 등을, 가슴을 내려친다. 영원히 빼지 못할 시커멓게 녹이 슨 대못을 열여섯 어린 손자의 가슴에 대고 힘껏 내리친다. 그깟 수험생이 대수냐며 네가 남편 옆에 같이 누워 자면서 살폈으면 이런 일이 없지 않았겠냐며 핏대를 올린다. 바짝 마른 낙엽처럼 곧 바스러질 것 같은 엄마에게 저기 서있는 니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을 해보라며 불을 뿜어댄다. 고요하고 잔잔한 호수 같던 마음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꽉 쥐어진 두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남편을 잃은 여인은 미망인, 부모를 잃은 아이는 고아, 하지만 자식을 앞세운 사람은 그 슬픔을 헤아릴 수조차 없어서 붙여줄 말이 없다지. 그래도 가족이니까, 나의 아픔만큼이나 너의 아픔도, 우리의 아픔도 조금은 헤아려볼 수는 없었을까. 얼마나 기가 막히고 힘이 드냐고, 앞으로 우리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지내보자 말할 수는 없었을까.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머리와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더 이상 흐를 피도 남아있지 않은 곳에 계속해서 칼과 창이 날아와 꽂혔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가 깊숙이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 사람이 떠난 자리                     


부고를 듣고 중국으로 건너가고, 그곳에서 장례를 치르고 대사관을 통해 시신을 한국으로 모셔오고, 한국에서 또다시 빈소를 차리고 장례를 치르고, 가늠할 수도 없는 뜨거운 곳에 차디찬 관을 밀어 넣고, 그 크고 건장한 아빠가 조그마한 단지에 가루가 되어 담겨 나오는 걸 보기까지, 아니, 대리석으로 만든 무슨 거대한 서재 같은 납골당에 넣어두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대체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거실에 모여 앉은 아빠의 동생들은 부의금 봉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방명록과 봉투에 쓰인 이름을 번갈아 확인하며 자신의 지인들이 낸 것들을 서로 챙겨댔다. 마치 고용된 회계사들마냥 지폐를 꺼내 세어보고 이게 내 손님이니 네 손님이니 해대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었다. 잠시 후엔 사망 보험금 이야기가 오가고 회사에서 받게 될 위로금 타령을 시작했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 방에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목과 어깨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껍데기만 남은 듯 너덜너덜해진 엄마와 우리 남매를 불러 앉힌 그들은 짐짓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희들은 이선, 이준이야. 박선, 박준이 아니라고. 앞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께 자주 연락도 드리고, 효도하며 살고!”                


웃기고 있네.                

 

일찍이 혼자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던 아빠와 저 멀리 살고 있던 그들은, 가족이라 볼 만한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아빠를 떠나보내는 동안, 모든 게 더 확실해졌다. 이제 당신들과 우리는 완벽한 남이 된 거라고. 효도는 내 엄마한테 할 테니, 당신들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직접 하시라. 겨우 그 따위 소리가 ‘어른 노릇’이라 믿는 당신들에게 내어드릴 곁은 이제 없다. 아들을 앞세운 자신의 아픔이 가장 크다며 남편 잃고 아빠 잃은 우리들에게 퍼붓던 원망과 저주의 말들을 잊어줄 리 또한 없다. 엄마는 다른 남자 만나서 도망갈 수 있지만 자기들은 나와 피를 섞은 가족이니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아빠 사망 보험금 나오거든 할머니 명의로 딱 돌려놓으라고, 이게 다 너희를 위한 거라고, 밤낮없이 몇 번씩이나 돌아가며 전화를 해대던 그 패악하고 간사한 입들, 열아홉 어린 나이에는 차마 해주지 못한 대답을 이제 해드린다. 그 입 다물라. 제발 좀 닥치세요.           


                                   

진정한 위로       

              

아빠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국제 학교를 다니던 준이는 대견하게도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고 싶다고 했다. 엄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고 나는 다시 고3 교실로 돌아갔다. 수능이 한 달쯤 남았을 때다.   

  

슬픈 기색 없이 학교에 돌아온 나를 보며 모두들 어색해했다. 차라리 시무룩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라며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않냐며 볼멘소리를 하던 친구들, 수능 만점도 바라볼 만한 녀석인데 올해는 아쉽게 되었다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보시던 선생님들. 나 또한 괜히 멋쩍었다. 이미 휘몰아칠 대로 휘몰아친 감정의 바다는 너무도 크고 깊어 더 이상 파도가 일지 않았기에 슬픈 눈빛으로 위로를 구할 수도 없었다. 끊임없이 차올라도 목구멍 아래에서 꿀꺽 삼켜버린 눈물들은 이제 더 이상 솟아나지도 흘러넘치지도 않았다. 내가 나의 자리에 돌아왔는데, 나의 모습일 수도, 나의 모습으로 보아주지도 않는 이 모든 상황이 싫었다. 한편으론 짧은 영화를 한 편 찍고 온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내 자리로, 아빠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일상을 시작한 것 같은 느낌. 이렇게 생각하면 또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한동안 내 곁에 머물던 어색한 공기를 깨고 별로 친하지는 않았던 옆 반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가만히 부르셨다. “하나도 실감이 안 나지? 우리 아버지도 작년에 돌아가셨거든. 일 년 동안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어제 아버지 처음 기일이 되니까 눈물이 터져 나오더라. 내가 진짜로 울기까지, 아버지의 빈자리를 알기까지 일 년이 걸렸어.” 툭툭, 어깨를 쳐 주시는 다정한 손길에서 알 수 없는 동지애 같은 게 느껴졌다.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 마음의 상태를 오롯이 공감해 주는 적당한 거리의 그 누군가가, 참 고마웠다.              

  

몇 차례의 장례 예배에서 나와 가족들을 보아온 교회 사람들은 그 후로 나를 볼 때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웃음을 지으며 ‘다 알아, 힘내!’ 같은 눈빛을 보내왔다. 때때론 빈소에서 며칠 동안 함께 밤을 지새워준 어떤 친구와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아니겠냐며 수군 거리기도 하고, 냉랭했던 친척들과는 그 이후로 무슨 일이 더 없었을지 소리 낮춰 속삭이기도 했다. 정확히 들리지도 않는 웅성거리는 소문들이 구름처럼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사람들을 피해 예배당 2층 한 구석에 앉았다. 나무 십자가 뒤에서 은은히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부서진 파편들로 어지러웠고 파도는 멈출 새 없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담담한 표정으로 무던하게 버티고 있지만 힘겨웠다. 나도, 준이도, 엄마도, 각자의 자리에서 담담하게, 하지만 위태롭게 스스로를 지키며 서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아빠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빠는 정말 저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게 빙긋이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까. 눈물도 아픔도 없는 곳이라는데, 그럼 그곳에서 우리를 바라볼 땐 대체 어떤 마음이 드는 걸까. 사실은 이 모든 게 그저 상상이고 허구였을까. 사람이 죽고 나면 반투명한 영혼이 둥실 떠올라 이 세계 어딘가를 전전하는 걸까. 혹은 아빠의 영혼이 당도한 곳이 하늘이 아니라면, 그 반대의 경우라면…….     


문득 몰려온 두려움에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조용히 다가와 저 멀찍이에 나란히 앉으신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마음이 들 수가 있어. 우리 아부지는 가끔씩 술도 한 잔씩 하시고 바쁘면 교회도 빠지고 그랬는데, 혹시…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남은 가족들의 마음에 불안과 걱정만 더해줄 때가 있지. 하지만 구원은 이 차표 같은 거야. 차표를 손에 쥔 사람은 그 사람이 오늘 무얼 먹었든 무슨 옷을 입었든 차에 탈 수가 있어. 우리는 모두 이 차표를 손에 쥔 사람들이야. 아빠는 편안히 그 차에 오르셨고, 우리는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 차표를 잘 간직하고 살다가 때가 되었을 때 그 차에 올라서 다시 만나면 되는 거야.”               

신학적 종교적 철학적으로 늘 논쟁거리였던 이야기, 하지만 아무래도 중요치 않았다. 이 땅에 남겨져 다시 오늘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나에게,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주었고 내일의 소망을 안겨주었으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하지만 문득 떠오를 때면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던 그 생각, 그 기분들이 한순간에 저 하늘 새털구름처럼 가볍게 떠올라 사라졌다.    

            

“그래요 아빠, 나 잘 지내고 잘 살게요. 우리 나중에 꼭 웃으며, 다시 만나요!”




다시, 일상

                    

모두의 우려와는 달리 그 해 11월, 나는 소위 말하는 SKY 대학에 너끈히 들어갈 만한 수능 성적을 거두었고, 덕분에 어색한 위로에서 탈출해 축하와 부러움, 약간의 시샘을 받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학교 앞 안암동으로 이사를 했고, 새내기 대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작년과는 아주 다른, 새로운 하루하루가 시작되었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바다 건너 두 아이를 돌보느라 바빠진 엄마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밀려드는 침울함에 잠기지 않으려 애처롭게 버티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의 앞에서는 슬픈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울지 않았고 말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꾸며내고 있었다. 인정하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웠고, 흔들리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까 봐 무서웠다. 학교가 훤히 내다보일 만큼 가까웠던 우리 집을 향해 나는 학교에 있으면서도 틈날 때마다 전화를 걸며 손을 흔들었고, 엄마가 혼자서 울고 있지 못하게 하루에도 몇 번씩 갑작스레 집을 들락거렸다.            

   

"엄마! 창문 밖으로 나 좀 봐! 나 친구들이랑 선배들이랑 여기 앞에 지나간다!"

"어머, 그러네! 재미있게 놀다 와!"               


"엄마, 또 혼자서 울고 있는 거 아냐?"

"아니야, 안 울었어."               


"엄마, 우리 오늘은 '나그네 파전'가서 막걸리나 한 잔 할까?"

"좋지! 몇 시에 내려갈까?"               


전화기 너머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목소리는 서로 모른 체했다. 수업이 끝나면 엄마와 팔짱을 끼고 학교에 가서 100원짜리 서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셨다. 너른 잔디밭 여기저기에 뒹굴거리는 친구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고, 다람쥐길과 법대 건물을 지나 중앙 도서관까지 학교 구석구석을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봄처럼 화사하게 빛나는 명문대생이 된 딸은 엄마의 자랑이었고 기쁨이었다. 엄마가 예전처럼 온 마음으로 웃는 순간들이었다.          

집안에 괜히 슬픈 기운을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아 매년 아빠의 기일을 모른 척 지나갔다. 준이와 엄마와 둘러앉아 가족 신파극을 찍고 싶지도 않았고, 기독교 집안에서 음식 가득한 제사상을 차려놓고 숟가락을 꽂아두기도 이상한 노릇이었다. 가까스로 평범하게 굴러가는 일상을 일 년에 한 번씩 굳이 주저앉힐 필요도 없었고. 봉안당을 찾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아주 가끔, 서로에게 말없이 혼자서 조용히 다녀오는 건 서로 모른 척 지나갔다. 슬픔을 딛고 이겨내 가는 우리 셋 나름의 방식이었다.     


그렇게 겨울과 봄, 여름이 지나갔다. 하루하루 위태롭던 날에서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마치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빠는 다시 주재원으로 중국에 잠시 지내는 것이라 말하고 믿으며 그렇게 일상을 살아냈다. 어떠한 부재의 흔적도 만들어내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새로이 만난 사람들은 모두 아빠가 오랜 해외 근무 중이신 정도로 알고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그렇게 믿으며 지냈다. 더 이상 어색한 공기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고 측은해지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한껏 세우고 반짝반짝 빛을 내며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 년, 이 년… 십 년이 흘렀다.          



그 해, 겨울               


볕이 좋은 가을이면 그리움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몇 번의 연애가 모두 가을에 끝났던 것이 우연은 아니었겠지. 스무 살 이후로 절대 꺼내지 않고 마음속에 담아둔 그 해 가을의 아픈 기억들이 가을이면 계절을 타고 스멀스멀 흘러나와 곁에 있는 사람들의 기분을 침잔하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끈적한 슬픔과 가시 돋친 그리움에 밀려나거나 질려서 떠난 사람들, 그들도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음속 한 켠에 절대 열지 않는 방을 만들어버린 나는 가을과 겨울이면 언제나 혼자였다.     

          

어김없이 차갑고 날 선 상태로 맞이한 어느 해 겨울,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연인이기 이전에 좋은 친구였던 민은 따뜻한 마음을 오롯이 쏟아부어주는 사람이었다. 닮은 곳 하나 없지만 마치 또 다른 나를 만나기라도 한 듯 취향과 마음이 놀랄 만큼 잘 통했고, 함께 있을 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거침없이 솔직했지만 모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잘 참고 잘 삼키는 네가 싫어. 그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나한테는 막 투정 부리고 짜증 부려. 괜찮아. 참지 말고 삼키지 마. 그럴 거라고 약속해줄래?”      

    

처음이었다. 내 안에 숨어있던 눈물이 그렁그렁한 열아홉 살의 선을 알아보아준 사람은. 너무 일찍 삼키는 법만 익혀 뱉을 줄 모르게 된 어른아이,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애어른을 보아준, 보듬어준 사람은. 마음 한 켠 숨겨둔 방문을 사이에 두고 우린 나란히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낡고 녹슨 방문은 살랑이듯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조금씩 흔들렸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고맙다, 힘들다, 서운하다, 속상하다, 슬프다…’ 이런 말들을 밖으로 꺼내고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온전히 열어보이고 오롯이 이해받으며 나는 한결 여유롭고 편안해졌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우리 집에선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기념할 일이 있을 때마다, 혹은 아무 날이 아니더라도 케이크에 불을 밝히고 샴페인 잔을 부딪쳤으며, 철마다 계절마다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매일같이 소풍을 나섰다. 엄마와 아빠는 언제나 신혼처럼 알콩달콩했고 그 사이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온 나는 늘 그런 가정을 꿈꾸며 자라왔다. 하루하루 희미하고 아득하게 멀어져만 가던 추억 속 장면들이 어느 순간, 점점 더 가까이, 점점 더 선명하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지만 아주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 한참을 정성스레 준비한 잔치 음식들의 냄새, 십 년 전 이십 년 전 우리 집에 들어온 것 같은 유쾌하고도 따뜻한 기운, 처음이지만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 그리고 두 팔 벌려 반가이 맞아주시는 어머니와 아버지, 빙긋이 웃고 있는 듬직한 동생……. 그의 집, 아니 우리 집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우리는 결혼을 약속했다.     



나 사실은 아빠가 보고 싶어     

               

10년이 흐른 그 해, 가을.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복잡했다. 십 년을 마음속 한 구석에 숨겨둔 아빠의 부재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청첩장 속에, 결혼식장에서, 아빠의 이름과 존재가 있어야 할 그 자리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칸이라는 사실이 아팠다. 이제 와서 한 사람씩 붙잡고 우리 가족이 화목하지 못해 깨어진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쩔 수 없는 헤어짐을 겪은 것뿐이라고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 옛날 구름처럼 내 뒤에 매달려있던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민과 나의 활짝 웃는 사진을 넣어 청첩장을 만들었다. 한참을 썼다 지웠다 하며 엄마 이름 옆에 ‘故’를 붙인 아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비록 아빠는 곁에 없지만 내가 아빠 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까,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너무나 오랜만에 활자로 된 아빠의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꾹 다문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용기... 용기가 필요했다. 나를 스스로 마주할 용기, 그리고 감추고 외면했던 나의 아픔을 인정하고 내어 보일 용기가. 정말 어른이 되어야 할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아빠의 열 번째 기일에 민이 조심스레 말했다. 결혼하기 전에 아빠한테 다녀오자고, 장인어른한테 꼭 인사드리고 싶다고 어린아이가 조르듯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몇 해가 흐르는 동안 훨씬 더 빼곡히 들어찬 죽음의 단지들이 차갑게도 쌓여 있었다. 알록달록 붙어있는 플라스틱 꽃들과 사진, 밖에서 스며드는 향 냄새, 여기저기서 메아리치듯 들려오는 곡 소리,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 사춘기 소녀처럼 뾰로통하게 말했다. “여기야. 아빠, 나 왔어요.”               


그땐 몰랐지만 지금 보니 참 말갛게 어렸던 이선, 까까머리 이준, 지금의 내 나이쯤이나 되었을 것 같은 젊은 엄마와, 이제 곧 나와 친구를 해도 될 것 같은 젊은 아빠. 허옇게 바래 가는 오래된 가족사진 속 모습들을 바라보며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민은 조심스레 양복 안주머니에서 청첩장을 꺼내 빛바랜 가족사진 아래에 붙이며 말했다.               


“아버님, 선이 이제 제가 잘 돌볼게요. 하늘에서 늘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저희 결혼하는 날에도 꼭 기쁜 마음으로 축복하는 마음으로 함께 해주세요. 선아, 나 이제 먼저 나가 있을게. 아빠한테 인사 잘하고 나와.”    

   

무슨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무슨 인사를 하라는 건지. 피식 웃으며 사진 속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용기가 필요한 순간,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순간이 되었다. 늘 그렇듯 말없이 빙긋이 웃고 있는 아빠의 얼굴을 보며 머뭇머뭇 마음속 이야기를 전한다.      


‘아빠, 나 시집가. 아빠랑 손잡고 입장해야 하는데 어쩌지? 아빠만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우리 되게 근사한 야외 결혼식도 준비했고… 아빠만 오면 되는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턱관절이 시큰했다. 참을 수 없는 딸꾹질처럼 눈물보다 흐느낌이 앞서 터져 나왔다.               

“아빠, 알지? 나… 사실은 아빠가 많이 보고 싶어.”          


                                             




가을, 오늘도 맑음                               


아빠,                

벌써 스무 해가 지났어요. 오늘도 그 날 만큼이나 눈이 부신 아침이에요. 늘 그래 왔듯 우리는 모두 이 날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면서도 잊은 척 모른 척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형체조차 남지 않은 유골함 앞에서 슬픈 척 고개를 떨구는 일도, 마주 앉아 밥을 먹지도 못하는데 상을 차리는 것도, 모두 의미 없고 부질없는 걸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어제처럼 생생하지만 또 영원이라도 흐른 듯 뿌옇게 지워져 가는 아빠에 대한 기억들은 늘 이 계절과 맞닿아 있어요. 굳이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이렇게 문득 가을의 기운이 묻어날 때면 20년 전 오늘처럼 뻥 뚫린 가슴으로 시린 공기가 드나들어 자꾸만 한숨을 몰아쉬게 되지요.      

          

아이가 태어나고 이 작은 생명이 온 가족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안겨주는 지를 보면서, 아빠가 나를 품에 안았던 때를 생각합니다. 이 아이를 아빠가 품에 안아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상상해 봅니다. 이제 ‘엄마’보다는 ‘할머니’로 불릴 때가 더 많은 나의 엄마를 보면서,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어떤 할아버지가 되었을까도 그려봅니다. 한 번 해본 적도 없으면서 낚시가 해보고 싶다고 매일같이 조르는 아이에게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엄마의 아빠도 낚시를 너무너무 좋아하셨어.”라고 대답하며, 내 아이의 손을 잡고 낚싯대를 드리워줄 아빠가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떠올려봅니다.     


죽은 뒤에 몸에서 영혼이 둥실 떠올라 이 세계 어딘가를 둥둥 떠다니는지, 저 구름 위 하늘나라에서 가끔씩 우리를 바라보는지, 혹은 정말 육신이 스러져갈 때 우리의 존재 또한 無의 세계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 나를 있게 했고, 유년 시절 내 안에 반짝이는 순간들을 가득 채워주었고, 떠나는 그 순간까지 가장 강하고 든든한 모습만 보여주고 불꽃같이 사라진 아빠의 존재는 나의 기억 속에서 늘 함께할 거예요.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어쩌면 영원히 표현하지 않겠지만, 이미 아빠의 나이에 닿아버린, 얼마 후면 아빠보다 나이가 더 많아질 나의 삶 속에서, 우리 함께 늙어가요. 이 모든 것이 언제든 순식간에 홀연히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걸 기억하며,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기뻐하고 즐기고 누리며, 아낌없이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그렇게 살게요.                


이 말을 입 밖으로 뱉기까지 꼭 10년이 걸렸고, 다시 글로 쓰기까지 또 10년이 걸렸어요.      


“아빠, 사실은 나 아빠가 많이 보고 싶어요.”                  


   

2020년 9월 13일, 선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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