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목소리 68
뉴스를 마칠 즈음 앵커는 수험생들에게 응원의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내일은 수능 날이다.
또래가 수험생이던 그 무렵 난 운 좋게 수능 시험을 피할 수 있었다. 무료함을 달래고자(혹은 내가 무사히 수험장을 비껴갔다는 해방감을 만끽하고자) 수능 날엔 이른 아침부터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모였다. 맥도널드에서 한껏 여유를 부려도 좀체 점심시간이 되지 않아 우리는 당구장으로 몰려들었고, 그곳에서 한 수험생의 자살 소식을 접했다. 그(혹은 그녀)는 1교시 언어영역 시험을 마치고 홀로 시험장을 빠져나와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시험장에 들어선 시각부터 어림잡아도 고작 2시간 남짓 흘렀을 시간. 그 짧은 시간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시험지를 받고, 듣기 평가를 하고, 초조함 속에서 문제를 풀고, 짓누르는 절망감을 애써 떨쳐내며 마지막까지 시험지를 붙들고 있다가 종이 울리는 순간 어떤 결심을 했을까? 혹은 이미 시험 시간이 중간을 지날 즈음엔 머릿속 가득 죽음을 생각했을까? 한 학생의 죽음은 고작 한두 시간의 뉴스거리가 되어 흘러갔고 죽지 않고 관문을 통과한 우리는 졸업을 거쳐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날의 풍경은 아득해졌다.
가끔, 아주 가끔은 그 무렵의 이야기를 한다. 일 년에 한두 번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막 시험을 마친 즈음엔 지금보단 훨씬 그것의 무게 감을 벗기 힘들었다. 어쩌면 실제로 그 시험이 삶의 방향을 조금은 바꿔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십 년 이상이 지나자 수능 시험 결과를 신세 한탄의 도구로 삼는 친구는 사라졌다. 어쩌면 오 년도 안 돼 자취를 감췄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렇게 한평생을 걸 만큼 중요했던 시험은 그 의미가 옅어졌다.
고작 이십 년이 채 안 되는 인생을 품고 남은 수십 년의 삶을 가늠해보는 건 실로 막막하다. 삼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한 시험으로 평가받는 것은 가혹하다. 하지만 한 시험이 그 모든 순간을 평가하지도 않고, 이십 년이 채 안 되는 인생을 품고 남은 수십 년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에서 일 년이 더 해질 때마다 우리는 그 일 년을 품에 안고 다시 한번 남은 삶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서른이 되면 삼십 년을, 마흔이 되면 사십 년을 품에 안고 남은 수십 년을 재차 가늠해 본다. 이십 년으로 남은 수십 년을 바라보기 버겁다면 잘 뭉개고 앉아 십 년을, 이십 년을 더 벌면 된다.
앵커의 한 마디에 꽤 오래전 기억이 머릿속을 비집고 올라온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길 바라고, 각자 원하는 결과를 얻길 바라는 마음이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고작 스무 해 남짓의 삶을 품고 앞으로 펼쳐질 수십 년을 단번에 결정짓겠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없길 덧붙여 바란다.
그림 / 정아 (https://www.instagram.com/lint3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