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만이라도
지난주 토요일 IT 서적을 보기 위해 강남 교보문고에 갔다가 '모든 것이 되는 법'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책을 절반쯤 읽은 시점에서 '강추'라는 단어를 붙일 만큼 잘 쓰인 책이라고 하긴 힘들다. 책의 모태가 된 저자의 TED 강연 '어떤 사람들에겐 하나의 천직이 없는 이유 Why some of us don't have one true calling'을 봐도 강연을 '잘' 한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다만 이 책에서 '다능인'이라는 신조어를 접하게 되었고, 그간 많이 고민하던 부분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나에게는 의미가 큰 책이다. 아래는 책의 내용과 무관(?)하게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들을 정리해 본 것이다. 어쨌든 책을 읽으며 한 생각이니 완전 무관은 아니려나.
나는 무엇 하나 지긋이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웹 서비스를 만들어 보겠다고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다가 서비스 페이지를 디자인하겠답시고 디자인 방법을 공부하고, 컴퓨터 안에서 떠돌아다니는 것은 뭔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제품을 디자인해서 만들어 보다가 판매 및 마케팅을 해보겠다고 다시 컴퓨터를 붙잡는다. 그러다 글을 쓰고 싶어서 글쓰기 플랫폼에 기웃거리다가 다시 컴퓨터 공부로 돌아가기를 몇 차례. 그렇게 나는 여러 분야를 기웃거리고 있다. (이 브런치에만도 벌써 3개쯤 되는 프로젝트가 담겨있다. 글쓰기에서만 3개쯤...;;)
평소엔 이렇게 여러 분야를 기웃거리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몇 개월에서 몇 년을 주기로 하긴 하지만 돌고 돌다 보면 돌아오는 지점이 몇몇 분야로 명확했고, 남들보다 조금 천천히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배운다고 생각하면 되었다. 그렇게라도 배워나가면 나중에 이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시너지를 발휘할 때가 기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러 분야를 돌다가 번아웃 되는 지점 혹은 문제가 되는 지점은 대체로 비슷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분야의 프로젝트를 적당히 마무리하고 다음 분야로 넘어갔다면 비록 그 전체가 하나의 맥락으로 묶이지 않을지언정 홀가분하게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시작의 열정이 사그라들고 프로젝트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새롭고 더 재밌고 의미 있어 보이는 프로젝트를 구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결과물을 만들지 않은 채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가면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고, 새로운 프로젝트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매번 깔끔하게 잘 계획되고 멋진 결과물이 나오길 희망하는 것도 문제였다. 당장에 아쉬운 결과물이라도 분명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알고, 멋진 계획만큼 허황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매번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그리고 새로운 난관에 부딪힐 땐 더 완벽한 계획, 더 깔끔한 결과물을 만들지 못한다면 시작하지도, 마무리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표류했다. 다양하게 기웃거리는 만큼 공중에 떠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도 해보고, 가장 관심 있는 하나의 일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안 하기로 마음도 먹어보고, 최근엔 다섯 개 프로젝트만 정해서 하루에 두 개, 하나에 두 시간만 투자하고, 나머지는 버리자는 마음도 먹어봤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도 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매번 새로운 흥밋거리들이 머릿속을 맴돌고 기존의 일들에 대한 관심을 식게 했다. 하지만 정작 그 새로운 일들은 쉽사리 시작하지도 못했다.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보려 한다. 어차피 머릿속을 맴도는 새로운 생각은 대부분 내 손으로 실현하지 못할 것들이다. 하지만 그 생각에 갇혀있는 동안에는 기존의 일들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렇게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여기 '뻥노트'에 차곡차곡 쌓아볼까 한다. 에세이 일수도 있고, 사업 계획이 될 수도 있고, 서비스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은 진짜 작게나마 실행해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대부분은 뻥이 될 것이다. 어차피 뻥이 될 거니까 마음대로 규칙 없이 떠들어도 되는 공간을 만들고 여기에 다 쏟아부어 버리면... 그럼 뭐 조금은 기존의 일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다 이 뻥노트에 있는 걸 하나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도 좋을 테고 말이다.
기존의 매거진, 글처럼 이 매거진도 언제 어떻게 버려질지 알 수 없다. 뭐 아무렴 어떻겠는가. 이 글도 '뻥노트'의 글이니 뻥으로 끝나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