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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군 Oct 28. 2015

장을 보다

무기력한 시간을 지나 의욕이 샘솟는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장을 봤다. 신나게 친구들과 떠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부지런히 집을 청소하고 샤워를 마친 후에, 의도보다 의욕이 앞서는 순간에 나는 마트에 들렀다. 이런 날이면 집에 없는 채소며 냉동식품을 잔뜩 집어 들었다. 충동적으로 담은 과자보다 봉지 값 20원이 더 아깝게 느껴졌다. 아마 이 비닐봉지도 다음 장 볼 날을 기약하며 잘 접힌 채 찬장 어딘가에 잠들게 될 것이다.

짐을 잔뜩 담은 봉지의 무게가 온전히 느껴지는 것은 집까지 이어진 길에 놓인 첫 번째 횡단 보도를 지날 즈음이다. 대략 5분의 2 지점쯤 되는 그곳을 통과하면 짐은 말 그대로 짐이 된다. 자신의 무게를 넘어서기 시작한 그것은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을 오를 때 원래 무게의 두세 배는 족히 넘어버린다. 어르고 달래어 겨우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면 이내 바닥에 자리를 잡고 퍼지는 것이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길에 의욕을 모두 잃지 않았다면 나는 부지런히 있어야 할 곳에 그것들을 정리해 놓는다. 하지만 나에게 남은 의욕이 충분하지 않다면, 급하게 정리해야 할 몇 가지를 옮겨놓고 나도 남은 짐과 함께 자리를 펴고 퍼져 버린다. 한 번은 싱크대에 대충 올려둔 계란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불상사가 난적도 있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방식으로 뱃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길바닥에서도 집 안에서도 짐 덩어리인 것이다.

새로운 짐 덩어리는 내가 다시 조금의 에너지를 갖고 그것들을 찾을 때까지 서늘한 냉장고, 어두운 찬장에 웅크리고 적당한 때를 기다린다. 그때가 오면 조금만 힘을 쏟아 부어도 그것들은 새로운 의욕의 자양분이 되었다. 부지런히 칼질하고, 춤추는 불길에 맞춰 손을 놀리고, 요리를 그릇에 담아내는 과정은 차곡차곡 의욕을 채웠다. 음식을 먹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설거지를 하는 순간에도 온몸을 움직임으로써 에너지를 만들어 냈다.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깊은 우물 속에 잠들어 있던 맑은 물이 빨려 올라오듯 에너지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펌프를 사용해 물을 긷던 시절 물이 잘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펌프에 물을 붓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마중물은 펌프 내의 고무마개와 펌프 사이의 틈을 막아 펌프가 물을 잘  끌어올리도록 돕는다. 자주 사용하는 펌프는 남아있는 물기가 마중물의 역할을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물기가 마른 펌프는 새로운 마중물이 필요한 것이다.

의욕이란 것도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오랫동안 의욕을 쏟아내지 못한 몸은 마중물을 붓기 전까진 온전히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의 에너지를 부어 몸을 움직이면 이내 새로운 의욕이 몸 깊은 곳으로부터 끌려 올라왔다. 그래서 조금의 에너지가 허락될 땐 마중물을 붓는 심정으로 장을 본다. 덕분에 오늘도 나의 냉장고는 빵빵하다.



#계간지 #장을_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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