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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군 Sep 26. 2015

개구리 라디오

상자에서 꺼내 올린 것은 먼지가 뿌옇게 쌓인 개구리 라디오였다. 집에 갔을 때 버릴 물건들 사이에서 건져 올려 한편에 챙겨두었더니, 아버지께서 부지런히 포장해 보내주셨다. 하던 짐 정리를 멈추고 라디오를 대충 닦아 전원을 연결해본다. 혹시나 하고 카세트 버튼을 눌러보지만, 반응이 없다. 손이 가는 데로 몇 번 더 버튼을 누르다 그만두고 스위치를 FM으로 바꿔본다. 스위치가 옮겨가기 무섭게 스피커에선 지직거리는 잡음이 흐른다. 늘 적막하던 공간을 메우는 소리가 반갑다. 소리를 적당히 키우고 오른쪽 다이얼을 가볍게 돌리니 이내 잡음이 사라지며 맑은소리가 스피커 가득 울린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맑고 깨끗한 소리다.

라디오 DJ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곤조곤한 말투로 쉽사리 주파수를 돌리지 못하게 하지만, 라디오가 흐르는 순간부터 머리를 스치는 채널이 있어 애써 다이얼을 돌린다. 오래된 라디오라 여러 채널을 거쳐 가도 어디가 어떤 방송인지 알 수 없다. 잠시 아무 채널에 주파수를 고정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주파수를 확인해본다. 93.1MHz. 주파수를 확인하는 창에는 인터넷으로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버튼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숫자가 듬성듬성 있는 긴 주파수 바를 훑으며 방송 채널을 일일이 확인할 필요 없이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방송을 들을 수 있다. 굳이 컴퓨터 앞에 앉지 않아도 된다. 그저 스마트폰 화면을 몇 번 건드리면 원하는 곡을 원 없이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애써 버튼을 외면하고 다시 라디오 앞에 앉아 열심히 주파수 다이얼을 돌린다. 대충 맞췄다고 생각했지만, 로고송과 함께 흐르는 방송국 이름이 찾던 그것이 아니다. 다이얼을 다시 조금 왼쪽으로 돌린다.

다양한 악기들이 어우러지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들 중 구분할 수 있는 소리래 봐야 바이올린과 첼로 정도가 다일까. 그래도 분명 오랜 시간이 녹아있는 음악이 흐른다. 드디어 원하는 채널을 찾은 듯하다. 가만히 앉아 음악이 끝나고 로고송이 나오길 기다린다. 이런 구식 라디오가 아니라면 허락되지 않을 순간이기에 기다림을 즐긴다. 긴 음악이 끝나고 원하는 채널임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주섬주섬 벌여놓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곡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예전에 즐겨 들었던 곡 중 하나인듯하다. 이젠 제목도 정확히 생각나지 않지만, 그렇게 흐르는 음악이 반갑다. 곡을 신청한 이의 마음이, 음악을 준비한 이의 정성이 담긴 음악은 뜻하지 않은 선물이다.


#계간지 #개구리_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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