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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군 Sep 27. 2015

견디다

종일 빡빡한 업무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방문을 여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둠이 나를 반긴다. 복도의 불빛만으로 방의 반대편 끝이 가늠되는 좁은 공간에 오늘도 나를 욱여넣는다. 목때 제거용 세제를 와이셔츠에 바르기 위해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빨리 이 짓을 끝내버리려고 세제 통을 뒤집는데, 액체로 된 세제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뚜껑을 열다 이중으로 된 마개까지 함께 열어버렸는데, 피로감에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급하게 손을 뻗어 흐르는 세제를 다시 통 속으로 밀어 넣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제가 흥건한 바닥과 그 세제를 손으로 밀어 넣으려다 주저앉은 모습은 내 일상의 적나라한 단면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데, 문득 사는 게 왜 이따윈가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렇게 어둡고 좁은 방에 웅크리고 앉아 펑펑 울고 싶어졌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다.’


드라마 연애시대 중 감우성(이동진 역)의 나레이션이다. 졸업이 없는 사회생활에서 처음의 그 흥분이 스치듯 지나고 나면, 어느새 삶은 견딤이 되어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지난주와 같은 이번 주가 반복된다. 나의 1년 뒤가 내 옆에서 또 하루를 견뎌내는 누군가에게 투영되는 순간 무력감이 밀려온다.

삶을 견뎌내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하루를 견디기 위해서는 꼬박 하루 치의 버둥거림이 필요하다. 눈을 뜨면 기꺼이 흐르는 물에 몸을 담가야 하고, 부지런히 이를 닦고 옷을 차려입어야 한다.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또 한 번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싱크대의 그릇을 씻고, 빨래하고, 널어놓은 옷들을 정리해야 한다.

우리네 삶 속에는 견딤이 필요한 시간이 있다. 그러한 순간이 오면 다른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저 묵묵히 하루 치의 버둥거림으로 하루를 채워야 한다. 그렇게 오늘도 하루를 견뎌낸다.


#계간지 #견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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