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군 May 27. 2016

와인

  와인을 마신다. 안주는 흔한 컵라면 하나. 고작 두 잔에 취기가 돌면 나는 한 번 더 그 순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순간에 나는 그녀와 마주 앉는다. 2012년의 어느 늦은 겨울. 나는 나와 그녀가 그 곳에 닿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숱한 만남의 과정이 그렇듯 우리의 시간도 이유 없이 흘러간다. 꽤 오랜 시간 그녀와 마주 앉아 있었을 테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입을 닫고 그녀의 눈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순간만이 기억의 한 구석을 채운다.


  그녀가 밝게 웃으며 메로나를 집어 드는 순간이 떠오른다. “이걸 먹으면 다음 날 숙취가 없어요.”라고 말하던 그녀가 떠오른다. 나도 그 날은 그녀와 같은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술에 취해 편의점에 들어서면 그녀의 말이 오래 묵은 시간을 건너온다. 나는 그렇게 녹색 아이스크림 앞에서 그녀를 떠올린다.


  급하게 택시를 잡아 타던 그녀가 떠오른다. 추운 날씨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늦은 시각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나와 어색하게 서 있는 게 싫었을 수도.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던지듯 뱉고 택시 문을 닫았다. 그 문이 그렇게 급하게 닫히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렇게 급하게 택시를 잡지 않았다면,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었을까.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리고 그녀는.


  취업을 한 후에도 그녀를 두 번 더 만났다. 가볍게 밥을 먹고 맥주를 한 잔 하는 정도로. 그녀는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했다. 나는 축하를 했던 것 같다. 잘 지내길 빌었던 것도 같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고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략 두 다리를 건너서.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마음 속을 빙빙 돈다. 그녀와 나에게는 그 세 번째가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느 한 구석에선 나에게도 그와 같은 후회가 깃들길 바란다. 그저 다시 한 번 볼 붉은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베어 무는 모습을 보고 싶은지도.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