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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군 Oct 13. 2015

쉬다

계란국이 쉬었다. 다시 먹기 위해 팔팔 끓인 뒤 냄비 뚜껑을 열었더니 조금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설마 하며 국그릇에 담뿍 떴다. 숟갈을 더할수록 쉬었다는 확신이 생겼다. 만든 지 고작 하루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었다. 날이 쌀쌀해 상온에 그냥 둔 것이 원인인 듯했다. 허탈했다. 족히 4번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것을 고작 한 번 먹고 버려야 했다. 달짝지근했던 그 맛이 입안을 감도는 듯했다. 입맛을 다셨다.

조금 서늘하다고 무턱대고 늘어놓은 음식은 여지없이 상했다. 잘 포장하여 냉장고에 부지런히 챙겨두어도 시간이 흐르면 음식은 여지없이 맛이 변했고, 식자재는 상했다. 비닐에 잘 싸서 넣어둔 깐마늘은 채 2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색이 바랬다. 한 달이 안 되어 젓갈이 상하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원래 발효 식품이라 얼마나 오래되든 먹을 수 있다던 김치조차 나의 손에서 검게 변해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용기를 잘못 선택하여 산화된 것이 분명했다)

변하는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마음이 그랬고, 관계가 그랬다. 푸른 봄날 내리쬐는 햇살에 뜨겁게 끓어 오르던 마음은 바짝 졸인 국의 그것과 같이 깊은 짠맛으로 남았다. 물을 다시 부어도 이미 숨이 죽은 대파처럼 마음은 이전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남았다. 먼발치에서 실루엣만 보고도 손을 높이 뻗어 흔들던 관계는 꺼내어 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여지없이 푸석하게 그 기운을 잃어갔다. 갈변된 감자처럼 푸석한 먼지 같은 것이 그 겉을 잔뜩 덮었다. 부지런히 변질한 겉을 도려내면 작아진 마음만 남았다.


당장 쓰지 않을 재료라면 차라리 다듬지 않는 것이 오래 보관하는 방법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대파도 당근도 감자도 흙이 묻은 대로 그렇게, 양파는 껍질을 입힌 채로 망태기에 담아서, 그렇게 서늘한 곳을 찾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감자는 이미 싹이 좀 났지만, 그 부분만 도려내면 언제든 훌륭한 식자재가 될 것이다. 흙이 잔뜩 묻은 당근도, 뿌리가 고스란히 드러난 대파도 잘 정돈되어 냉장고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 비해 훨씬 오래 내 곁에 머물 것이다.

마음을 오래 보관할 방법은 찾을 수가 없다. 관계가 빛이 바래는 걸 막을 방법이 없다. 이미 손질이 끝난 재료들처럼 그것들은 변화의 시간을 달려간다. 잘 손질하고, 부지런히 관심을 두면 잠시간은 맛좋은 음식으로 머물지도 모른다. 다만, 시간이 좀 더 진득하게 그들의 변화를 재촉하는지도 모른다. 한 번 손을 탄 것들은 부지런히 시간에 등 떠밀린다. 원하지 않던 변화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한 번 손을 탄 것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다. 잘 어루만질 자신이 없다면 섣불리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차라리 현명한지도 모른다. 의욕이 눈을 가렸다는 것은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것들을 바라볼 때야 비로소 드러날 뿐이다.

나의 설픈 의욕이 오늘은 익은 계란을, 파를, 양파를 계수 대를 거쳐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보냈다. 다 먹지 못한 음식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입안을 쓸고 간 여운이 허전한 것이 아니다. 손이 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 손이 탔고, 그래서 그것들이 조금은 더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상실해갔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지만, 내 손을 거쳐 변해 가는 것들은 늘 마음이 쓰인다. 변해가는 마음을 보는 것도, 변해가는 관계를 바라만 보는 것도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계간지 #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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