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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Jan 18. 2021

마리모를 버렸다

놓지도 못하고 

한 6년쯤 전인가 마리모라는 식물을 선물로 받았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말과 함께. 물에 사는 일종의 이끼라는 이 녀석은 주먹보다 약간 큰, 투명한 잼 병같은 병에 담겨 있는 동글동글한 녹색 풀때기였다. 

 

그 선물을 받았을 때 내 우울은 굉장히 심했다. 그보다 무기력할수 없었고 입만 열면 지금의 내가 봐도 들어 줄 수 없을 정도의 부정적인 말이 아무렇지 않게 쏟아져나왔다. 그 즈음 많은 친구들을 잃었다. 내 모습을 들키기 싫어 숨어 버린 사람도 있고, 우울만을 말하는 내 모습에 질려 더는 네 부정적인 말과 우울을 쏟아내는 용도로 나를 쓰지 말아 달라며 나와의 관계를 끊은 사람의 수도 꽤 되었다.


 이해한다. 그 때의 나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우울이 더 짙고 깊었다. 손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울을 묻혔다. 뚝뚝 떨어질 정도로 끈적하고 찝찝한 감정들. 몇 년이 지나며 왜 힘든 나를 끝까지 잡아 주지 않고 놓아 버렸지 하던 친구들에 대한 원망이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변했을 때쯤엔 나만큼 우울했던 사람을 내가 도저히 견디지 못해 놓아 버린 일도 있었다. 차마 그들을 욕할 수 없게 된 거다. 그 때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 이래서 걔네가 그때..


친구는 떠났지만 마리모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방구석 어딘가에서 계속 존재했다. 몇 달에 한 번 그나마 깔끔하게 청소를 할 때마다 위치를 바꾸곤 하며 남아 있었다. 딱 그만큼의 정성과 마음으로 남아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내게 남은 건 저것뿐이라는 생각에 버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우울에 찌들어 잘 돌보지도 못했다. 말라 죽지만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키우던 화분들이 떠올랐지만 저건 물 속에 있는 이끼니까 손이 덜 가서 그나마 낫다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났다.


뭔가 이상했다. 사실 전부터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다. 마리모는 기분이 좋으면 둥둥 뜬다고 했다. 내 마리모는 떠 있는 걸 본 적이 처음 집에 왔을 때 말고는 없었다. 광합성을 하면 기포를 만들어 뜬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은데. 집에서도 가장 햇볕 안 드는 방에 관심 하나 두지 않고 짧으면 며칠, 길면 몇 달에 한 번 쳐다보는 유리병을 내가 햇볕을 보게 뒀을 리가 없다. 아니, 무엇보다 몇 년이 지났는데 크기가 그대로였다. 성장이 늦은 거라고 볼 수준이 아니었다.


마리모는 죽으면 색이 변한다고 했다. 누렇게 뜬 그런 칙칙한 색. 누렇다 하긴 뭐했지만 그래도 녹색에 훨씬 가까운 내 마리모는 죽었다고 생각하긴 좀 어려웠다. 아니. 죽었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마음 깊이, 저건 이미 진작에 죽었고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무서워한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인생에 많은 일에 그랬듯, 일어나지 않은 일인 척 했다. 그렇지 않은 척 했다. 몇 달에 한번 마리모를 유리병에서 꺼내어 아무렇지 않은 듯 물기를 짜고 물을 갈아 주었다. 자갈에 약간 미끌하게 낀 물때가 마음에 걸렸지만 한 번도 닦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별 생각없이 마리모를 꺼냈다. 두 조각으로 찢었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몇 년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때라고 생각했나.아닌가. 여튼. 안은 이미 누랬다. 겉만 멀쩡해 보였던 거다. 마리모는 언제인지도 모르지만 죽어 있었다. 나는 죽은 이끼를 방에 몇 년간 둔 것이다. 사실 겉도 누런 빛이 약간 감돌아 있었지만 애써 녹색이라고 믿고 싶었던 거겠지. 이젠 다시 못 볼 친구가 준 물건이라는 마음에 버리지 못했었다. 내 행복을 위해 내 방에 온 동그란 녹색 이끼는  내가 얼마나 미련 많은 사람인지만 확인시켜줬다. 


살면서 많은 인간관계가 그렇고,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이미 진즉 끊어지고 죽어 버린 관계. 차마 끊지도 버리지도 못한다. 마음을 충분히 쏟지도 못하면서 거두지도 못한다.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거나 대충 봐도 이미 속의 고름이 티가 나는 수준이라면 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채 느슨히 손 위에 올리고 쥔 것도 놓은 것도 아니었던 관계. 


마리모는 변기통에 버렸던 것 같다. 쓰레기통에 버렸나. 어떻게 버렸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걸 보면 내 애정은 그것밖에 되지 않았나 싶지만 사실이 그렇다. 우울에 탓을 돌릴 수도 있겠지만  여러 마음이 엉켜 있을 것이다. 미안함. 고마움. 죄책감. 그리움. 미련.마리모를 버릴 때 이런 의미부여를 하진 않았지만 찢은 마리모를 버렸을 때의 기억이 이 렇게, 희미하지도 않고 오히려 전혀 나지 않는 걸 보면 단어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든다. 아무렇지 않지도 않았냐면 그건 아니고, 그렇다고 슬펐냐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착잡함에 가깝지만 그보다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아, 모르겠다. 그냥 모르겠다. 


마리모같이 기억할 만한 기념품은 없는 관계지만 마리모가 떠오르는 관계가 몇 있다. 어떤 관계는 사진 몇 장만 지우면 흔적이 사라질 것이다. 어떤 관계는 내가 먼저 하는 연락만 관둬도 끊어질 것이다. 마리모같은 관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맺음 없이 끊어진 관계들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흘러가게 두는 게 맞을까.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관계들이 떠오른다. 마리모는 다시 떠오르지 못했지만. 


문제의 마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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