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은 마음보다 큰 가격표

술을 사러 갔는데.

by 구연산

가격표를 한참 노려봤다. 애꿎은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레미마르땡이 맛있었냐, 글렌피딕이 맛있었냐 물었다. 레미마르땡은 12만 8천원인가 그랬고, 글렌피딕은 9만8천원이었다. 친구는 레미마르땡이 맛있었다고 대꾸했지만 나는 12만 8천원을 낼 수 없었다. 애초에 눈은 글렌피딕에 붙어 있었다. 그나마 제일 싼 거.


몇 달간 말 그대로 술이 마시고 싶었다. 절주를 한 지 꽤 되었다. 감정에 휘둘려 마시는 술 말고, 상황이 내 맘같지 않아 들이붓는 술이 아닌 진짜 술을 느끼는 음주가 고팠다. 향을 느끼고 맛을 혀에서 데굴데굴 굴려 보는 그런 술마심. 그래서 꽤 큰 맘을 먹고 밖을 나섰다.


다이소에 먼저 들렀다. 자꾸만 조금씩 우는 빔 프로젝터의 스크린을 잡아줄 자석과 벽에 거는 고리를 샀다. 4000원 정도를 쓰고 롯데마트엘 갔다. 고기 코너를 구경하고, 좋아하는 양고기를 판다는 걸 처음 알아 신이 났고 생각보다 비싸 집어들기 전 마음에서 내려놨다. 흥이 좀 떨어졌지만 얼른 걸어 술 코너에 갔다. 술을 보면 좀 나아질거야. 청소를 하시던 이모님께 여쭈어 주류 코너의 직원을 불렀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이것뿐이냐 물었다. 진열된 것 외에는 딱히 없다고 했다. 행사하는 상품이 없냐 물었다. 없었다. 내가 살 수 있는 술은 세 종류가 있었다. 마시면 좋아할 만한 술들이다. 비슷한 술들을 마셨을 때 꽤 좋았으니. 하지만 생각지 못한 가격이었다. 술의 가격표는 내가 먹고 온 마음보다 컸다. 커도 너무 컸다. 몇 달간 말 그대로 술을 마셔 보고 싶었으니 사자,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십만 원을 왔다갔다 하는 선택지 사이에서 나는 그걸로 뭘 할수 있는지 따져봤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떠올랐다.


동생의 학원비를 한 달 더 결제해 줄 수 있다. 고기를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다. 한번 화면을 껐다 키면 배터리의 10퍼센트가 사라지곤 하는 핸드폰의 수리를 맡길 수 있다. 자꾸 깜빡깜빡하는 컴퓨터의 9년 된 하드 드라이브를 바꿀 수 있다. 뭐 또 많겠지. 연어회 10번. 드로잉용 공책 30 권. 핸드폰 요금 4달. 여하튼 뭔 짓을 해도 술보단 나을 것 같았다. 100미리당 14000원인가 하는 가격표에 표정은 멀뚱했지만 속으로는 기겁을 했다.


가격표만 하염없이 노려봤다. 다른 술을 봤지만 내가 좋아하는 게 없었다. 정말 가끔 마시고 싶은 진 하나만이 맘에 들었지만 그것도 비쌌다. 5만 얼마. 무슨 진을 5만원을 주고 사 마셔, 툴툴댔다. 결국 가격표만 하염없이 노려보다 행사를 하는 맥주를 집어 왔다. 맥주를 집어 나오는 순간 주류 코너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저렇게 물어봐 놓고 결국 맥주 사가네, 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아니겠지만. '저런 생각 할 리가 없어, 그리고 내가 십만 원을 체면 때문에 쓰고 나면 속상할 거고, 저 사람은 하나도 모를 거야, 저 사람이 내 통장 잔고 책임져 주는 거 아니잖아,라고 계산대에 갈 때까지 끝없이 되뇌였다.


술을 샀다면 통장이 아팠을 거다. 술을 못 사서 아픈 마음보다 통장이 더 크게 아플 것 같다고 믿어야 한다. 정말 많이 줄이고 줄인 술이지만 가끔, 정말 가끔은 이렇게 내가 돈 때문에 술이 아니더라도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한 다는게 속이 상한다. 마음이 애리다, 진짜.


산 맥주는 그냥 그랬다. 뻔히 아는 맛이고, 사은품으로 붙은 보냉병인가 하는 건 조잡한 뚜껑이 달려 있었다. 괜히 황망해서 이것 저것 사부작거렸다. 두 개 남은 초코파이를 꺼내 씹고, 방을 쓸었다. 맥주를 따라 마셨다. 스크린은 여전히 운다. 은근히 찌글찌글, 보일듯 말 듯 벽에서 울고 있어 울고 싶은 건 난데 나 대 신 스크린이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일의 썸머도 울었고, 에일리언도 울었다. 내 마음도 속으로 조용히 울었다. 오늘 전국적으로 비가 왔다는데, 하늘도 우는데 울지 않은 건 내 통장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울음을 삼킨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여하튼.마시고 싶은 술은 못 샀다. 울고 싶지만 스크린이 대신 울어주고 있으니까 나는 울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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