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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연산 Jan 21. 2021

먹은 마음보다 큰 가격표

술을 사러 갔는데.

가격표를 한참 노려봤다. 애꿎은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레미마르땡이 맛있었냐, 글렌피딕이 맛있었냐 물었다. 레미마르땡은 12만 8천원인가 그랬고, 글렌피딕은 9만8천원이었다. 친구는 레미마르땡이 맛있었다고 대꾸했지만 나는 12만 8천원을 낼 수 없었다. 애초에 눈은 글렌피딕에 붙어 있었다. 그나마 제일 싼 거.


몇 달간 말 그대로 술이 마시고 싶었다. 절주를 한 지 꽤 되었다. 감정에 휘둘려 마시는 술 말고, 상황이 내 맘같지 않아 들이붓는 술이 아닌 진짜 술을 느끼는 음주가 고팠다. 향을 느끼고 맛을 혀에서 데굴데굴 굴려 보는 그런 술마심. 그래서 꽤 큰 맘을 먹고 밖을 나섰다.


다이소에 먼저 들렀다. 자꾸만 조금씩 우는 빔 프로젝터의 스크린을 잡아줄 자석과 벽에 거는 고리를 샀다.  4000원 정도를 쓰고 롯데마트엘 갔다. 고기 코너를 구경하고, 좋아하는 양고기를 판다는 걸 처음 알아 신이 났고 생각보다 비싸 집어들기 전 마음에서 내려놨다. 흥이 좀 떨어졌지만 얼른 걸어 술 코너에 갔다. 술을 보면 좀 나아질거야. 청소를 하시던 이모님께 여쭈어 주류 코너의 직원을 불렀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이것뿐이냐 물었다. 진열된 것 외에는 딱히 없다고 했다. 행사하는 상품이 없냐 물었다. 없었다. 내가 살 수 있는 술은 세 종류가 있었다. 마시면 좋아할 만한 술들이다. 비슷한 술들을 마셨을 때 꽤 좋았으니. 하지만 생각지 못한 가격이었다. 술의 가격표는 내가 먹고 온 마음보다 컸다. 커도 너무 컸다. 몇 달간 말 그대로 술을 마셔 보고 싶었으니 사자,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십만 원을 왔다갔다 하는 선택지 사이에서 나는 그걸로 뭘 할수 있는지 따져봤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떠올랐다. 


동생의 학원비를 한 달 더 결제해 줄 수 있다. 고기를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다. 한번 화면을 껐다 키면 배터리의 10퍼센트가 사라지곤 하는 핸드폰의 수리를 맡길 수 있다. 자꾸 깜빡깜빡하는 컴퓨터의 9년 된 하드 드라이브를 바꿀 수 있다. 뭐 또 많겠지. 연어회 10번. 드로잉용 공책 30 권. 핸드폰 요금 4달. 여하튼 뭔 짓을 해도 술보단 나을 것 같았다. 100미리당 14000원인가 하는 가격표에 표정은 멀뚱했지만 속으로는 기겁을 했다.


가격표만 하염없이 노려봤다. 다른 술을 봤지만 내가 좋아하는 게 없었다. 정말 가끔 마시고 싶은 진 하나만이 맘에 들었지만 그것도 비쌌다. 5만 얼마. 무슨 진을 5만원을 주고 사 마셔, 툴툴댔다. 결국 가격표만 하염없이 노려보다 행사를 하는 맥주를 집어 왔다. 맥주를 집어 나오는 순간 주류 코너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저렇게 물어봐 놓고 결국 맥주 사가네, 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아니겠지만. '저런 생각 할 리가 없어, 그리고 내가 십만 원을 체면 때문에 쓰고 나면 속상할 거고, 저 사람은 하나도 모를 거야, 저 사람이 내 통장 잔고 책임져 주는 거 아니잖아,라고 계산대에 갈 때까지 끝없이 되뇌였다.


술을 샀다면 통장이 아팠을 거다. 술을 못 사서 아픈 마음보다 통장이 더 크게 아플 것 같다고 믿어야 한다. 정말 많이 줄이고 줄인 술이지만 가끔, 정말 가끔은 이렇게 내가 돈 때문에 술이 아니더라도 갖고 싶은 걸 갖지 못한 다는게 속이 상한다. 마음이 애리다, 진짜.


산 맥주는 그냥 그랬다. 뻔히 아는 맛이고, 사은품으로 붙은 보냉병인가 하는 건 조잡한 뚜껑이 달려 있었다. 괜히 황망해서 이것 저것 사부작거렸다. 두 개 남은 초코파이를 꺼내 씹고, 방을 쓸었다. 맥주를 따라 마셨다. 스크린은 여전히 운다. 은근히 찌글찌글, 보일듯 말 듯 벽에서 울고 있어 울고 싶은 건 난데 나 대 신 스크린이 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00일의 썸머도 울었고, 에일리언도 울었다. 내 마음도 속으로 조용히 울었다. 오늘 전국적으로 비가 왔다는데, 하늘도 우는데 울지 않은 건 내 통장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울음을 삼킨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여하튼.마시고 싶은 술은 못 샀다. 울고 싶지만 스크린이 대신 울어주고 있으니까 나는 울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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