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존여비 사상을 고발합니다.

여보세요, 나는 여자이기 전에 그냥 당신과 같은 사람입니다.

by 이승현

우리 집은 어릴 적부터 유교사상을 그대로 고수하며 남존여비 사상이 굉장한 집안이었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쯤이었나?

사촌 오빠에게는 미안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드는 나의 기억 속 한 장면이 있다.



사촌 언니는 어린 나를 돌보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사촌 오빠는 내내 TV를 보고 TV 리모컨을 마구 돌리고 있었다.

거실에 오빠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주방에서는 쉴 새 없는 물소리와 칼로 채소를 다듬는 소리가 났다.

참으로 상반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어린 나에게는 꽤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왜 오빠는 TV 보고 놀고 언니는 주방에서 내내 설거지해?라고 반문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 물음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고 어린 나는 결국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배가 몹시 고팠고 집에는 밥이 조금밖에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성화를 부리는 나와 오빠를 향해 언니는 그 당시 짜파게티를 끓여줬고

조금밖에 없는 밥을 우리에게 다 양보했다.

보다 못해 화가 난 내가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진 잘 모르겠지만.)



"오빠는 밥 먹지 마. 언니 이 밥 먹어"라고 했을 때 나는 언니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고 그날 오빠는 나에게

있는 짜증 없는 짜증을 다 내며 욕설을 마구 내뱉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양보하는 언니가 불쌍하고 화가 났던 것 같다.



언니는 전전긍긍하며 내내 오빠의 눈치를 살폈고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호되게 혼냈다.



내 입장에선 별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혼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고 식탁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고 민망한 장면이다.



당시 10살이던 나에게 충격적이던 그 드라마 같은 장면은 유감스럽게도 내가 성장하면서 우리 집에서 매일매일 더 많이 보게 됐다.(정확히 말하면, 우리 집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보게 됐던 것 같다. 물론 우리 집안이 유독 심하다고 나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2017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금은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우리 집안은 사실 매달 제사가 있는 집안이었다.

일 년에 제사가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

제사가 한 달에 몇 개씩 되던 날도 참 많았다.



그런데 그 제사 풍경은 정말 영화가 따로 없다.

제사가 되면 이모들과 엄마 언니 그리고 나와 동생들은 한데 모여 상을 펴고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한다.

허리를 피고 좀처럼 쉴 시간 따윈 없다.



참 얄밉게도 내 남동생과 오빠들, 아빠, 이모부들, 외삼촌은 고스톱을 치거나 TV를 본다.

자신의 손끝 하나, 손에 미세한 털 하나 물에 닿지 않는다.



더 충격적인 건 내가 중학교 시절부터 봤던 엄마와 이모들은 제삿날, 명절날 늘 식혜까지 손수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어린 내 시야에 그들은 앉아서 "여보 물, 여보 나 식혜 좀"라고 시키기만 하는 걸로 보였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분명 우리 집안이 드라마에 나오는 콩가루 집안처럼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안사람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모양이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똑똑한 언니도 우리 집안의 남존여비 사상에 딱히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게 나에겐 더 충격적이었다.




'모두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




우리 집안에서 남존여비 사상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딱 나 한 사람이었다.




사회에서도 집안에서도 어쩌면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잘못됐어도 잘못됐다고 옆에서 같이 말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그 집단에서 내가 잘하고 있는 거더라도 내 올바른 의도와는 다르게 그저 내가 잘못된, 혹은 이상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연을 꺼내면 많은 독자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할지 공감을 할진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내겐 남존여비 사상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사건 하나가 있다.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이 사연을 꺼내려는 지금도 내가 덜 자란 탓인지 서러움이 마구 북받치려고 한다.

(물론, 독자분들 중에는 이런 일이 없으셨길 간절히 바랄 뿐)




내 남동생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당시 꽤 마른 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통통한 편이었다.



뭐든 잘 먹는 나와는 달리 남동생은 입이 짧은 편이었고 고기, 햄과 같은 인스턴트식품이 아니면 밥을 잘 안 먹는 편이었다.



학교를 다녀와서 주방에서 삼겹살 냄새가 나길래 엄마에게 고기했어?라고 묻는데,

엄마는 단호히 아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 몰래 남동생에게 고기를 구워주신 거였고 동생의 저녁 메뉴와 우리의 저녁 메뉴는 엄연히 달랐다.


동생에게만 고기를 구워주거나 먹을 걸로 차별받는 건 몹시 가슴 아프지만, 그 당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우리 집안에선 흔한 일이었다.



내가 서러워서 울면서 먹는 걸로 차별하지 말라고 말하자 엄마는 아주 당당하게 밥상 머리맡에서 울면 재수 없는 거라고 말했다.



동생은 말라서 불쌍해서 챙겨준 거라면서.

너는 여자 애니까 다이어트하라고 살 빼라고



그때 알았다. 사회적 미의 기준이, 그 잣대가 여성에게만 유독 엄격하다는걸.



그리고 우리 네 식구가 같이 밥을 먹을 때면 고기 메뉴를 하면 내가 많이 먹어서 동생이 먹을 게 없다면서

엄마는 나에게 그만 먹어 라고 그 당시 매번 면박을 줬다.

동생 밥그릇에 고기를 어여삐 놔주면서. 넌 얼른 먹으라고



그래서인지 나는 이유 없이 식탐이 많아졌고 아직도 누군가와 밥을 먹을 때면 체할 것만 같이 허겁지겁 먹는 버릇이 있다.



여전히 생각해보면 서러운 사연인데 백번 천 번 내가 이해해서 그럴 만도 하다,라고 넘긴다면.




그 이유는 아마 우리 집은 남존여비 사상의 집안이니까.

그도 그럴만하다 싶기도 하고.




우리 집은 그 당시 주방에 남자가 들어오면 큰일 나는 집안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도 그럴 만도 하다 싶기도 하다.




근데 참 이상하지 않은가?




여자만 설거지하고 여자만 집안일하고 여자만 손에 물 묻히고 제삿날, 명절날 허리 한번 못 피고



남자는 제삿날, 명절날 TV 보고 식혜 먹으면서 편하게 고스톱 치라고 조상님께서 우리 집안에 일러주신 건 아닐 텐데..



우리나라의 유교사상이 우리 집안에서 혹 잘못 받아들여진 건 아닐까? 수없이 생각했다.



사실 우리 집안에는 남자상, 여자상이 따로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사를 지낼 일이 점차 사라지면서

불행 중 다행으로 사실상 폐지됐다.



폐지됐다고 말하는 것도 참 웃기지만 우리 집안은 늘 제사나 명절에 고기나 해산물 같은 맛있는 음식은 남자 앞에, 여자들은 그들이 밥을 다 먹고 주방 어귀에서 상 모퉁이나 다 치우고 밥을 먹곤 했다.




여자만 설거지하고 여자만 집안일하고 여자만 손에 물 묻히고 제삿날, 명절날 허리 한번 못 피고.




집안일. 과연 여자만의 일일까?



선심 쓰듯이 '내가 집안일 도와줄게'라는 표현이 과연 맞을까?




집안일은 절대 여자만의 일이 아니며 같이 해나가야 하는 하나의 과정일 뿐

'도와준다'라는 표현 자체도 엄연히 말하면 잘못됐다.

그것도 남존여비 사상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밥도 같이 먹는데 당연히 음식물 쓰레기, 집안일, 설거지 같은 그런 귀찮은 일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다 같이 해야 하는 게 맞다. 내가 귀찮으면 아내도 귀찮고 내가 싫으면 누나나 언니도 싫을 수도 있다.

내가 서러우면 반대로 그 사람도 서럽지 않겠는가?!

우리는 남녀 이기전에 똑같은 사람이니까.




아직도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주방에는 여자나 들어가는 거야, 남자는 손에 물 안 묻히는 게 맞아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의 미래를 위해 다시 생각해보길 권한다.




물론 몇십 년이 걸리긴 했지만 우리 집은 아주 코딱지만큼 변한 것 같기도 하다. (변했다고 말하기도 참으로 민망하지만.)



우리 아빠는 설거지를 여전히 안 하시지만 "여보 물 좀 줘"라고 권위적으로 나왔던 과거에 비해 물은 이제 직접 가져다가 드신다. (그게 처음부터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적으면서도 내 얼굴이 다 빨개지는 기분이다.)




"아빠, 집안일은 여자의 몫이 아니야! 같이 하는 거야."

여자들만의 일이 아니라고 말해봤자 아빠는 집안일은 여자가 하는 거야라고 말하신다.




내가 이렇게 소리 내어 울분을 토해도 우리 집안이, 우리 사회가 결코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나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나와 같이 슬퍼하고 같이 비판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잘못됐다고 용기 내어 같이 말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쉽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우리 사회가 크게 뒤바뀌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우리 집은 집안일이 다 여자인 엄마와 내 몫이지만 그래도 하나 틀림없는 사실은

나는 이 남존여비 사상을 내 손녀 세대에는 절대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한다.




나는 그들에게 여자이기 전에,

우리는 당신들과 똑같은 사람입니다.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남존여비 사상의 우리 집안의 에피소드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데 그건 차차 썰을 풀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