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대로

by MIN

생리학 첫째 주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험 전날 밤 열한 시 반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중고등학교 때 꽤나 친했던 친구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했다. 사인을 물었다. 친구가 얘기하길, 심장 쇼크사라고 하는 것 같았어.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방비 상태로, 무엇과도 비유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충격을 친구가 받았을 걸 생각하니, 참 가슴이 저렸다.


카데바 실습을 시작한 지 이제 2주 정도 되어간다. 지독한 포르말린 냄새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실습 첫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시신을 처음 보는 경험이기도 해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생사는 종이 한 장 차이구나, 죽음이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날은 집에 가서도 시신의 잔상이 계속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연세가 환갑이 되었다. 나 자신은, 아직 젊어서인지 늙어간다는 느낌을 지금까지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늙어가는 아버지 어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이 흐르는 걸 멈추고 싶을 때가 간혹 생긴다.


수많은 고민과 상상 속에 살아간다. 그중에 실제로 택해지는 길은 하나며, 그렇기에 과거가 현재의 우리를 만드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단 하나의 길만이 선택되기 때문에, 후회, 원망, 미련의 감정들이 종종 따라온다. 이미 상영된 영화의 시나리오를 지우고 다시 쓰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의 뇌는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껏 운명은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저 사람이 만든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나 누군가가 나의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고 여겨, 썩 좋아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러나 요즘에서야 조금씩 알 것 같다. 운명이라는 개념이 왜 생겼는지, 왜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는지, 조금씩은 이해가 간다.


이미 일어난 일, 내 의지대로 바꿀 수 없는 일.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저지른 실수, 이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하는 미련, 하지 말걸 그랬어하는 후회, 쟤는 왜 그랬을까 하는 원망. 혹은,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주변 사람의 상황, 이미 벌어진 사고, 나와 주변 이들의 건강, 더 나아가서는 죽음.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토록 수많은 상황 앞에서 무력해진다. 이들은 이해와 설명의 영역을 벗어날 때가 많다. 이해와 설명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지고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이들은 우리를 잠식시킬 수 있는 힘이 충분하다. 이들로부터 우리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 통로가, 운명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닐까.


바쁘게 살아온 몇 달간 떠올랐던 생각과 감정들을 비로소 정리해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두서가 없다. 요는 이거다. 바꿀 수 없는 것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이미 벌어진 일들을 흐르는 대로 흘려보내는 자세를 가지고 싶다.


2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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