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어느 날 제주
작년 가을, 제주도, 아주 짧았던 1박 2일, 내내 비가와 여러가지를 포기해야 했지만 즐거웠던 그 여행에서.
나에게 가장 강렬히 남은 것은 이 사진 한 장, 커다란 달팽이 사진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큰 달팽이는 처음 봤다. 이 달팽이를 발견하기 전, 역시나 비가 내리고 있었고, 미끄러운 바닥에 한차례 넘어졌다. 그 넘어짐 끝에 달팽이를 만났다.
산방산에서 용머리 해안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달팽이를 보자니 문득 떠오른 문구.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어디서 봤던 문구일까? 검색을 해보니 정목스님의 책 제목이란다. 난 이 책을 본 적도 없는데, 왜 이 문구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면서 천천히 문구를 곱씹어 봤다.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느리다'와 '늦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 달팽이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이 달팽이의 시간에서 결코 '늦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달팽이만의 시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늦었다'라고 하는 개념은 어쩌면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개념이 아닐까.
이런 달팽이의 삶은 나의 처지와 맞닿았다.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굉장히 느린 삶을 살고 있다. 대학을 오랫동안 다녀 남들보다 늦은 졸업을 하자마자 대학원을 갔고, 졸업한 이후 이 일, 저 일 들어오는 대로 하면서 살고 있다. 세상이 흔히 물어보는 '직업이 뭐에요?'라는 질문에 아직 나는 할만한 대답이 없다. '프리랜서'라는 말로 포장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그 대답이 정말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갓서른이 되었을 때, 한참을 괴로워했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지금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오랜만에 만난 대학교 친구들을 보면서 뒤쳐지고 있다는 그 열등감에 사로잡혀 괴로웠다. 그런 시기에 저 달팽이를 만났다. 느려도, 늦지 않는 달팽이를. 여기저기에서 왱왱대는 결혼도 하지 않는 고학력 여성에, 결혼과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아닌 나. 뭐 어떠한가, 조금 느리더라도, 비오는 제주도에서 커다란 달팽이 사진 한 장 찍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삶이라면, 그걸로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