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도
서평가 박진권, 제호 표류도, 출판 다산북스
비겁한 사람은
계속해서 비겁의 뒤에 숨는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존감에서도 생성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을 욕보이지 않고, 그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타인을 싫어하는 자존감 낮은 인류가 줄어든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어디에 있든 파벌을 만든다. 그리고 남 욕하는 것을 당연한 문화라고 말하고 다닌다.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그러한 소리를 했다. 왜냐하면, 그는 교사였고, 본인이 퍽 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월급 많이 받는 대기업 직원보다 더 많은 공부를 했다고 믿었다. 또한, 교사의 월급이 상당히 적으며, 자신이 그들보다 많이 공부했음에도 월급이 부당하게 적다고 피력했다. 더해서 이제는 주 52시간이 되어 삶의 질이 상승하지 않았냐는 소리까지 내뱉었다. 여름과 겨울에 방학을 즐기고, 겨울에도 해가 중천에 걸려 있을 때 퇴근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 52시간이 일수로 어떻게 환산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에서 주 52시간씩(주 6.5일) 노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위장 끝으로 꾹 눌러 담았다. 주호민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닌 사람의 행태는 더욱 놀라웠다. 카페에 있는 사람 모두가 바라볼 정도로 큰 소리로 통화를 하는 등 결혼한 사람을 비하하는 듯한 말을 하고 다녔다. 멍청한 허영인지 세상 물정 모르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부모의 월급이 1,000만 원 이상 되어야 한다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위에 언급했든 비하하는 듯한 말의 의미는,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며 계속해서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는 소리다. 자기의 생각을 표출하는데 비겁함까지 묻어났다. 비단 직업적 특성 때문에 이런 사상을 습득한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남에게 투영하여 비난하는, 이것 역시 점잖지 못하고 떳떳한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를 끌어들이고 중국인을 앞세우고, 허약하다. 너무 허약하다.” -일본 산고, 박경리 작가.
표류도의 현회는 현실에 없는 사람처럼 당당하다. 자기의 말을 내뱉는 것에 거리낌 없고, 그것의 뜻을 돌려 말한들 명확하게 표현한다. 그러니까, 비겁하게 타인을 빌려 남을 힐난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것에 주저앉아 있지만 어떤 고결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의 좋지 못한 시선을 무시한다. 벼락부자 계영과 그녀의 친구들이 창부를 대하듯 하는 언행과 시선에도 현회는 굴하지 않는다. 극 중에서 현회가 유독 계영에게 표독스러운 말을 내뱉지만, 단어 선택에 품격이 느껴진다. 사모님 소리를 듣는 계영과 마담 소리를 듣는 현회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숭고함의 격차가 있다.
만일 나의 연인이, 그리고 내 딸이, 나에게 의무적인 또는 동정이나 강요에 못 이긴 포용을 했다고 하자. 그것은 기막히는 일이다. 나는 그들, 사랑하는 그들을 잃을지언정 그들 마음속의 화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마음속의 어머니처럼 나를 억지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 -표류도, 박경리 작가.
땅이 중요한 게 아니다
표류도의 소설에는 파트롱(patron)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이 단어에는 보호자라는 뜻이 있다. 미술계에서는 예술의 보호자 또는 후원자를 말한다. 프랑스어로는 성녀를 뜻하기도 하지만 해당 소설에서 말하는 파트롱은 후원자를 뜻한다. 물론 좋은 뜻이 아니다. 현대에서는 이것을 스폰이라고 말한다. 연예계에서는 성 상납을 대가로 스타를 만들어 주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 행태는 일반인 중에서도 종종 거론된다. 스폰서의 뜻 또한 행사나 자선 사업 따위에 기부금은 내어 돕는 사람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후원자와 비슷한 느낌이다. 여기서 함부로 할 수 없는 지론은 이런 것이다.
직접 돈을 받고 불특정한 다수의 사람과 성관계하는 창부와, 후원을 받으며 특정한 인물과 성관계하는 피후견인의 차이를 나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선술집 등지에서 교태를 부리며 자신의 성을 무기로 술과 안주를 얻어먹는 사람과, 종국에는 성관계까지 하는 일반인이 창부가 아니라고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생활양식의 유형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정신 상태를 지적하는 것이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성을 무기로 대가를 받는 행위는 결국 창부와 다름없다.
“현기야, 나는 너 일에 간섭하고 싶지 않다. 너도 이제 지각이 생겼을 테니까. 그렇지만 충고는 필요할 거야. 그렇지? 여자한테서 말야, 물건을 얻거나 용돈을 받는다는 것은 남의 구두를 닦아주고 필요한 돈을 얻는 것보다 훨씬 천한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해. 사내 녀석이 할 짓은 아니야.” -표류도, 박경리 작가.
“종삼에는 하룻밤의 파트롱이 있고, 거대한 양옥집에는 장기간의 파트롱이 있으니 여자들은 다 자신 있게 살 수 있는 물건이야. 공연히 골치 아프게 남의 걱정은 왜 하누.” -표류도, 박경리 작가.
비슷한 사람과 떠내려가는
행복의 표류도
아무리 싸워도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다. 내가 이 사람과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적은 인연 말이다. 그런 걱정이 아예 없다는 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비슷한 생각 한다. 이야기의 뜻과 결론은 비슷하거나 같지만, 그 말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다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은 한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을 매번 상기한다. 여러 번의 언쟁을 거듭해도 지치지 않고, 손을 놓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결국 같은 곳으로 향할 것이고, 서로가 잘못된 길로 빠진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지쳤을 땐 덤덤한 위로와 격려를 전달한다. 계속해서 비슷한 곳으로 떠내려간다. 해안선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바다 위에 아주 작은 두 개의 섬이 있다. 그것들은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을 유지하며 평생 가라앉지 않을 것처럼 유유히 표류한다.
“여자가 슬픔에 젖어 있다는 것은 애처롭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자를 존경할 수는 없어요. 못난 사람은 슬픔 속에서 패배하지만 올바른 사람은 오히려 슬픔 속에서 보다 강한 자기의 개성을 만듭니다. 설교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의 현회 씨에게는 설교가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현회 씨는 옛날에 양말장수를 하고 밤을 새워 번역을 하고 그러면서도 희망과 자부심을 가지고 대학동 거리를 거닐던 그 시절로 돌아가셔야만 합니다. 반발을 잊지 마세요, 슬픔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이 크면 클수록 그 반발은 커야 할 것입니다. 찬수는 그 반발력이 없어서 죽었습니다. 그는 어쨌든 패배자였습니다. 현회 씨가 나하고 결혼을 하겠다는 것도, 또 내가 현회 씨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우리들에게 공통점이 있는 때문입니다. 애정보다 마음이 맞다는 것, 생각이 같다는 것, 헤치고 나갈 세계가 같다는 것, 그런 점이 둘을 결합시켜 줄 것입니다. 상현이는 감정의 대상이요, 찬수는 지성의 대상이요, 환규는 의지의 대상입니다. 의지는 마지막의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우리는 의지의 세계를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애정이나 일이나 죽음까지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표류도, 박경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