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산고
서평가 박진권, 제호 일본 산고, 출판 다산북스
잊을 수 없는 사실
우리를 겨누는 총과 칼이 없는 지금, 개인의 말을 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표현의 자유라고 하지 않나. 그러나 그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며, 혐오의 표현도 자유라고 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애초에 표현의 자유라는 말 자체가 틀린 말이고, 모순덩어리다. 표현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남의 가족을 조롱하며 ‘희극’으로 웃어넘겨야만 하는 미국의 상황도 다를 바 없다. 크리스 록과 윌 스미스의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폭력을 정당화하고 싶진 않다. 폭력을 사용했다면 그것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표현의 자유라는 방패 뒤에서 말로써 상대를 공격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그것이 지식인의 교양 있는 토론이 아닌, 그저 비하와 조롱뿐이라면 당사자는 무엇으로 응수해야 할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다.
남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은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이즘을 대변하지도 않는다. 그저 치기 어린, 아이의 그릇된 욕망에 가깝다. 이 말은 굳이 남성과 여성을 따로 두고 하는 게 아니다. 극단으로 치우친 사람들의 생리는 너무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 대한민국 남성의 성기 크기를 폄훼하면서 여러 곳곳에서 계속해서 이상한 손가락 모양을 하는 자칭 어떤 이즘의 어린아이들은 사상가라고 할 수 없다. 자신의 방구석도 치우지 않고, 당장에 어떤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면서, 종일 바닥에 앉아 남의 명예와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시위도 아니고, 운동도 아니다. 또한, 주변에서 흔하게 보기 어려운 나쁜 여성상을 한국 평균 여성상이라며 비하하는 것들도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연애도 거부하고, 결혼을 혐오한다. 서로의 성별을 과격하게 밀어내고, 힐난한다. 동조자들을 찾아 나서고 자기의 뜻과 다른 사상을 표출하면 같은 성별이라도 혐오하고, 파괴하려 든다. 이 행태를 보이는 사람을 정신병자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박경리 작가의 시선은 깊고 날카롭다. 작가는 일제 강점기를 지났으며 6.25 전쟁을 겪었다. 민족의 수난과 참상을 그대로 밟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무분별한 힐난은 없다. 명확하게 비판한다. 반일본인이 아닌, 반일본이라는 뜻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일본의 원류를 공부하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한다.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을 증오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어떤 경우에서도 지고 싶지 않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경제보복을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또한 일본이 싫고, 중국이 싫다. 하지만 우리는 강대국에 끼어 있고, 휴전국이기 때문에 보다 능숙한 처세술이 필요하다. 일본과 중국 때문에 자국민끼리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화합이 필요하다. 더 이상의 분단은 필요하지 않다.
‘역사’는 익숙한 것이면서도 낯설다. ‘역사’는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것이면서, 교육과 교양, 계몽과 학습의 도구로 가장 빈번히 호출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적으로 호명되고, 가공된다. ‘여기 지금’ 호출된 ‘역사’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가진 그 무엇이 된다. 이제 ‘역사’는 누군가에겐 치명적인 무기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기도 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그것이 실린 여러 매체, 그리고 역사가·소설가·출판편집자·정치인 등 다양한 유저(user)의 필요에 의해 새로이 구성된 과거이다. -일본 산고, 박경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