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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권 Aug 26. 2024

단일 관계에 매몰된 채 자신을 내버리는 사람

성녀와 마녀

단일 관계에 매몰된 채

자신을 내버리는 사람 

    

다른 인연은 모두 버려둔 채

한 사람에게만 맹목적인 사랑을 보낸다.

배우자도, 부모님도, 심지어 자식까지 밀어두는 

그 이성 없는 배반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서평가 박진권, 제호 성녀와 마녀, 저자 박경리, 출판 다산북스     




더러운 피깨끗한 피

개천에서 용 난다. 좋지 못한 환경의 한계를 뚫고 나올 만큼 대단한 사람이 나온다는 소리다. 그러나 현재는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를 준비하는 세상이다. 개천에서 나타난 용은 서울로 상경해 자기가 이무기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황금 용이 나지 않는 이상, 개천에서 용 날 일은 더욱 드물어졌다. 이처럼 태생의 한계는 명확하게 존재한다. 뛰어난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를 부르고, 그들끼리 결합 된 결실 또한 훌륭한 유전자에 속해있을 가능성이 높다. 소설 속 안 박사는 자기 아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형숙을 밀어낸다. 형숙의 어머니가 요부였기 때문이다. 안 박사는 아들에게 형숙의 어미는 재미로 남자를 꼬여내고, 그 가정을 파탄 낸 후 유유히 사라지는 마녀라고 설명했다. 형숙의 몸에서는 더러운 피가 흐르고 있다고 소리쳤다. 유전의 힘은 위대하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형숙 또한 빼어난 미색을 보유하고 있다. 그 특유의 웃음은 남자들의 심금을 울리기 충분하다. 늘씬한 몸매에 매혹적인 웃음은 모두의 선망과 질투를 한 곳에 모은다. 그렇다고 해서 형숙이 마녀라고 단언할 수 있나?     


결혼 문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의 조언으로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말한다. 상대방의 학벌과 경제력 그리고 집안을 보고 계산적으로 만나야 한다고. 그러나 사람마다 그 기준이 너무도 다르다. 실제 대한민국의 이혼율은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하는 수준이다. 100명 중 약 46명이 이혼한다. 최소 10년 이상 잘살고 있는 사람의 조언과, 이혼한 사람의 조언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조건을 깐깐하게 살펴보고 결혼한 사람들도 결국에는 이혼한다. 인생에 한 번뿐이라며 결혼식에 수천만 원을 사용하고 화려한 신혼여행을 갔다 온 사람의 끝이 이혼이다. 그들에게 결혼은 엄청난 손해를 안겨준 어리석은 제도로만 보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결혼을 장려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겪은 일을 전부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안 박사도 그렇다. 자기가 당한 배반의 상처를 자식에게 투영한 것이다. 그리고 헤어지길 강요했다. 요부의 자식도 같은 요부이며, 더러운 피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결혼은, 인생은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한다고 해서 모든 결혼이 파국으로 끝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재고 따지는 현대의 결혼관이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 돈 없는 결혼의 끝은 파국이다. 하나, 사랑 없는 결혼 또한 파국이다. 적어도 자신의 배우자는 스스로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저기서 쓸데없는 말을 듣고 선택하는 건 멍청한 행동이다.      


“아무도 사람의 감정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지배할 권리는 없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며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 나는 좋아했을 뿐이다. 사랑했을 뿐이다. 마음속으로, 누구한테도 폐를 끼친 일은 없었다.” -성녀와 마녀, 박경리.     


성녀와 마녀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피해야 하는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물귀신처럼 타인까지 끌어들이는 사람은 피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자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이다. 기회만 있다면 은인의 등에 칼을 쑤셔 넣을 수 있는 냉혈한이다. 이 글을 읽고 ‘나잖아?’라고 생각된다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사건이 생각나고, 그 일로 해서 ‘나 또한 연민에 빠진 게 아닐까?’하고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박경리 작가의 성녀와 마녀에는 두 여성이 나온다. 자신을 더러운 피라고 모욕한 안 박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형숙과, 한없이 유약해 보이나, 중심을 잘 잡고 지탱하는 하란이다. 형숙은 안 박사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 안수영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렇게 온갖 방법으로 안수영의 정신을 삭막하게 만든 후 홀연히 떠나버린다. 몇 년 후 다시 나타난 형숙은 다시금 안수영을 유혹한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오롯이 안 박사에게 복수하기 위한 집념이다. 그 이유 또한 단 한 번의 더러운 피라는 언급 때문이다. 형숙은 자기 영혼의 안식을 위해 한 가정을 파탄 낸다. 단 한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이 사랑한 사람과 그의 아내 그리고 자식까지 지옥으로 떨어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여자다. 부가적으로 온갖 남자들 또한 말이다.    

  

결과적으로 하란은 가정을 지켰다. 그러나 안수영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가정을 지켜냈다. 유약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중심을 잃지 않았다. 과히 가정의 대들보라고 해도 손색없는 여장부였다. 하란은 자기를 지키는 것에 있어, 형숙을 원망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남편마저 원망하지 않았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뚝심으로 가정을 지켜낸 것이다. 그녀 또한 모멸감에 치를 떨었지만, 사람으로서 살기를 택한 것이다. 이혼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상에서 온갖 풍파를 견뎌내고, 가정과 아이를 지켜낸 하란을 성녀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다.     


하란은 계집아이에게 말하고 고기를 썰었다. 저녁식사 때 가족은 실로 오래간만에 식당에 모였다. 수영은 형숙의 영상을 안고 하란은 허세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이 상반된 인간과 인간이 모인 가정이란 질서 속에서 그들은 조용히 대면하는 것이었다. -성녀와 마녀,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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