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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권 Aug 28. 2024

우리는 결국 모두 타인이다

타인들

우리는 결국

모두 타인이다   

  

마음이 녹을 정도의 눈빛을 보내도,

따뜻한 손으로 감싸 안아도,

끊지 못할 혈액으로 이어져 있어도,

부모, 자식, 형제, 자매도 결국.     


서평가 박진권 제호 타인들 저자 박경리 출판 다산책방     




할 수 없는 말과 해야 할 말

부모와 자식 간에도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물론 부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관계를 단절시킬 목적이 아니라면 해야 할 말도 있다. 가족 사이에 비밀이라는 벽돌을 쌓아 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허무는 것은 죽기보다도 힘들다. 벽돌 사이사이에 오해라는 찐득한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할 수 없는 말과 해야 할 말을 평생 고민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숨 쉬듯 자연스러워졌을 때 불화를 전보다 훨씬 사그라들 것이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 하진은 전쟁 후유증을 겪고 있는 미술가다. 그러나 그 후유증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다. 그것으로 인해 붓도 놓았다. 10년을 같이 산 아내에게도 그 비밀을 숨겼다. 그렇게 속부터 썩다 못해 타들어 간 하진은 마약에 의지한다. 아편 중독자가 된 하진은 더욱 예민해지고 의미 없는 향락에 빠진 채 날카로워졌다. 보다 못한 아내가 직접 물어보기도 하지만, 오히려 윽박지르며 서로가 남이라는 것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그런 하진의 곁에서 숨 막히는 하루를 살아내는 부인 문희도 덩달아 시들어 간다. 진작에 부인에게라도 털어놓았다면, 아편에 손을 댈 일도, 무분별한 바람을 피울 일도, 10년 동안 손에서 붓을 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 16세에 겪은 공황장애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소한 병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공사장 옆 인도로 걸어가지 못해 30분을 돌아가는 불편함이 있었을 뿐 병원을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차를 타도 사고에 대한 인식에 사로잡히고, 집에 있어도 혹여 있을 비행기 추락이 우리 집으로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됐다. 시원한 가을날 반소매를 입고 있음에도 댐이 무너진 듯이 땀을 흘리기도 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시장과 카페 등 사람의 소리가 많아지고 커지면 점점 정신이 압축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귀가 멍하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 상태로 청소년기와 군대를 지나 성인이 되었다. 남들 다 버티는 것을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걸까 하는 자책을 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 없는 고통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의사에게는 할 수 없는 말과 해야 할 말이 모두 쏟아져 나왔다. 이후 가족에게도, 연인에게도 털어놓을 수 있었다. 30년을 예민하게 살아왔는데, 겨우 말을 토해냈다고 사람이 달라졌다. 분명 유해짐을 느낀다. 이렇듯 사람은 해야 할 말은 꼭 내뱉어야 한다. 할 수 없는 말도 언젠가는 믿을만한 사람 한 명한테는 뱉어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혼자 삭히는 것은 속에서 썩어갈 뿐 해결책이 될 순 없다.     


‘나는 지금 걷고 있다. 깊은 계곡 속을 무한정 헤매고 있다. 발부리에 끈적끈적한 피가 괴는 것 같다. 포 소리가 왜 이렇게 먼지 모르겠다. 아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전선에 포 소리가 멎으면 무서운 것이다. 포 소리가 멎은,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침묵의 전선…… 무엇이 일어날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무엇이 다가오고 있다. 아아, 수천 마리의 까마귀 떼들이 날아내린다. 날갯소리가 소나기 같구나. 온통 하늘이 까맣다. 푸른 구멍, 하늘 구멍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구나! 수, 숨이 막힌다. 아, 저, 저 마구 날아올라 가는구먼! 눈알을 다 빼먹은 까마귀 떼들이 날갯짓을 하며 춤을 추고 있다. 눈알이 빠져버린 송장이…… 그, 그런데 살아서, 숨이 붙어서 팔을 휘젓고 있지 않느냐! 숨을 할딱이고 있다. 지리산, 지리산, 영순이…… 나는 지금 계곡 밑바닥, 피가 끈적끈적한 곳을 거닐고 있다. 양편 능선에서 보이는 무수한, 저 무수한 총구, 적의 총구가 기왓장 밑의 서까래 같다! 내가 넘어지면 까마귀 떼가 날아내릴 것이다. 눈을 쪼아 먹고 그리고 살을 쪼아 먹을 것이다. 내 숨이 넘어가기 전에, 영순이, 아 영순이, 움직이던 팔뚝…….’ - 타인들, 박경리.     


“나는 내 욕망에만 사로잡혀 있었어. 정애를 갖고 싶어 했고, 비정상적인 내 환경에서 일어서 소리치고 싶었던 거야. 그러기 위해 나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썼었어. 형을 진구렁창에 밀어 넣고 그리고 내 자신도 진구렁창에 빠졌다는 것을 몰랐거든. 나는 형을 파멸시키려 했고 형의 재산을 뺏으려 한 악덕한이었어. 변명이야 정애 때문에 그랬노라 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내 욕망이라 할 수밖에 없을 거야. 머지않어 쇠고랑을 찰.” - 타인들,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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