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족
서평가 박진권 제호 뱁새족 저자 박경리 출판 다산책방
잘못 만들어진 단어
인간이 만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 상황에 만족하고 그곳에 안주하는 사람은 능력 없는 패배자로 몰아가는 탓도 있다. 어떤 훌륭한 사람은 만족과 동시에 발전을 꾀한다. 지금도 만족스러운 인생이나,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길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현재에 있는 그대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진실한 만족은 속세에서 벗어나 절에서 도를 닦으며 수행에 수행을 거듭하는 승려들만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경리 작가의 소설 뱁새족은 주인공 유병삼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유병삼이라는 인물은 속물을 지독하게 싫어하지만, 속물 자체인 친누나에게는 애정을 보인다. 또한, 그렇게 속물이 싫다고 온갖 표현을 끌어다 장황하게 연설하면서 누나에게 20만 환이라는 꽤 큰 금액을 빌리기도 한다. 어떤 날은 친구 따라 부잣집에 그림을 팔러 가기도 하는 등 속물인지 거머리인지 모를 모습을 보인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고자 파리 유학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평범한 사람인 것을 깨닫고 천박한 속내를 겉으로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절제 없는 자유는 천박한 사람의 전유물인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소설에는 온갖 뱁새들이 난무한다.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면서 그것에 순응하지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 유병삼,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사람도 모두 이용하고 가차 없이 내버릴 수 있는 박영수, 정치가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주변 여자에 침을 질질 흘리는 차영호 등 자칭 황새들의 무리에 섞이고 싶어 하는 뱁새들은 가랑이가 찢어진다.
하지만, 극 중 부자로 나오는 사람들 또한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체면만을 중요시한다. 진실과 만족은 개나 주고,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려 발버둥 친다. 물론 그것에 위인지 아래인지 천당인지 지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사람들이 정해둔, 당시의 시대상에 알맞은 상류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아래 있는 사람을 발로 차고 위에 있는 사람도 끌어내린다. 소설 속엔 황새를 쫓는 뱁새들이 난무하지만, 어디에서도 황새를 찾아볼 수는 없다.
“진실이 모욕이 되는 세상이죠. 뭐 오늘날만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가랑이가 찢어져도 황새를 따라갈려는 뱁새의 비극은 바로 그것이 희극이라는 데 있죠. 재능이 없으면서 천재가 되어보겠다고 파리까지 비싼 여비 쓰고 갔다 온 놈을 위시하여 돈푼이나 긁어모은 상놈이 어느 명문 호적에 기재된 이름 석 자밖엔 가진 것 없는 거지 처녀를 비단에 싸서 데려오는 위인, 졸업장 한 장 우물쭈물 얻어둔 덕택으로 학자 행세하게 된 인사, 남의 재산을 계산하고 장래의 대재벌을 꿈꾸는 사람, 사업가 호주머니 털어서 여자나 끼고 다니며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를 넘보는 건달이, 남들은 천 미터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데 겨우 백 미터 지점에서 허둥지둥 뛰면서 사랑의 순결을, 사회의 정의를 목마르게 외치는 전 시대적인 친구, 어디 그뿐인가요? 용모도 연기도 신통치 않은 계집애가 정조만 제공하면 황홀한 스타의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하고, 사십을 넘은 황혼의 미모로써 폐비廢妃 소라야의 호사를 바라보고, 한밑천으로 사내 발목을 묶어놓으면 어부인으로 승격을 믿어마지않는 요정의 마담, 그리고 또오…… 많죠. 생략하기로 합시다. 나는 항상 말이 헤퍼서 탈이죠.” -뱁새족, 박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