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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권 Sep 10. 2024

순결만을 갈망하는 까닭은 스스로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은하

순결을 갈망하는 까닭은

스스로가 타락했기 때문이다     


순결한 것을 바라는 것이 죄악은 아니다.

잡티 하나 없이 맑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결에만 집착하는 행위는

자신이 떳떳하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서평가 박진권 제호 은하 저자 박경리 출판 다산책방     




놓아버리는 것

인간은 삶이라는 굴레 속에서 무수히 많은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고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간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을 수는 없다. 고통에 내성이 없는 사람, 심약한 사람에게 극복만큼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극복해야 한다. 내성이 없다면 만들어질 가능성이 남은 것이고, 심약하다면 정신력의 강화라는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평생 회피하고, 스스로 놓아버리는 것은 현명한 판단은 아니다. 되는대로 사는 마음가짐은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흘러가는 그대로 사는 것과 막 사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다. 인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단계를 바라보는 것이 흐르는 인생이다. 놓아버리는 것은 사방이 막혀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고이고 썩는 인생 최대의 악수다.     

박경리 작가의 소설 은하는 당시 여성의 천편일률적인 순결 가치관을 이야기한다. 소설 속 주인공 인희는 연인의 외도에 충격을 받고 자신을 놓아버린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 회사의 사정이 어려워져 애 딸린 사업가 이성태에게 팔려 갈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인희는 선택할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뿌리칠 자유가 존재했다. 그럼에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버지의 제안을 수락하고 만다. 스스로가 인생의 난도를 대폭 상향 조정한 것이다. 그 후 인생은 불 보듯 뻔하게 흘러간다. 성욕에 미친 이성태의 성 노리개로 전락하고,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자기의 인생을 한 번 더 놓아버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쓰러진다. 딸을 팔았다는 죄책감에 급사한 것이다. 발인이 끝난 밤 인희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애도의 시간도 갖지 못하고, 또 이성태에게 겁탈당한다. 단 한 번의 실수에 인생 자체가 수렁에 빠져 꿈도 희망도 모두 사라진 것이다.

     

물론 이야기는 결국 인희의 성장으로 좋은 결과를 맞이한다. 남편 이성태가 인희의 계모와 바람이 났다는 천인공노할 사실을 듣고 그녀는 집에서 도망을 나온다. 그리고 자기를 잡으러 온 이성태의 차에서 몸을 던져 뛰어내리며 두 번째 도망을 감행한다. 이 두 번의 회피는 자주적인 의지라고 표명할 수는 있겠으나, 지혜에서는 동떨어진 행동이다. 첫 번째 회피는 아버지의 재산도, 계모와 이성태의 파렴치한 행동 모두 단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희는 맞서 싸울 젊음이 있었고, 충분한 동기와 힘도 있었다. 마을 전체에 소문이 날 만큼 이성태와 계모의 민심은 좋지 않았다. 또한, 이야기 후반에 변호사까지 대동해 자신을 도와줄 강진호라는 사람도 있었다. 손을 내밀고, 마음만 먹었다면 그 둘을 단죄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인희의 각성은 그저 회피와 자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차에서 뛰어내린 행동 또한 자기의 생명을 놓아버리는 악수였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 살아날 순 있었지만, 행운의 반대편에는 항상 불운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진정 자주적이고, 지혜로운 판단은 자신의 앞길에 놓인 난관을 헤쳐 나갈 마음가짐이다.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은 절대로 좋은 결과를 맞이할 수 없다.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자연도 인간도 사랑스러웠고 또한 무한한 기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한 사람을 싫어함으로써 온갖 것에 대하여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은하, 박경리.     


“욕심이 너무 많아 실패지. 에누리하구 좀 더분더분 살란 말이야. 순수만 찾지 말구.” “순수? 내가 순술 찾을 계제가 되었니? 그건 옛날의 얘기야.” “그렇지 않아. 넌 왜 강진호 씰 받아들이지 않지? 너 생각에는 그 사람을 희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그게 틀린 일이야. 넌 너 자신을 얌전하게 모셔두구 싶은 거야. 너무 자신을 아낀단 말이야.” 은옥은 사정없이 비판한다. “그런 역설이 어디 있니?” 인희도 약간 부아가 나는 모양이다. “역설이라구? 천만에. 나 같음 상대자의 갈망을 받아주겠다. 무조건 미래를 계산하지 않는다, 당장에 파탄이 오더라두 말이야, 넌 너무 겁을 내구 있어. 처음부터 넌 감정을 송건수로부터 강진호 씨에게 대담스리 옮겼음 좋았을 걸 그걸 무슨 죄악처럼 생각했거든. 쉽사리 감정을 이동하는 것을 넌 죄악시했기 때문에 비극이 온 거야.” -은하, 박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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