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1살의 나는 당시 담임선생에게 학대받고 있었다. 급식을 더 먹고 싶다고 말하면 “네가 뭘 잘했다고 더 먹어!”라며 핀잔을 주고, 볼에 상처가 남게 꼬집기 일쑤였다. 선생님 학급 내에서 검사부와 청소부 등 여러 행정 부서를 만들었다. 당시 촌지를 잘 주었던 아이들은 매번 검사부에 발탁되었다. 그 수준이 낮거나 나처럼 촌지를 조금도 주지 않은 아이들은 항상 청소부를 전전했다. 끊임없는 차별과 학대에 신물이 났다. 심지어 그 선생은 손가락 전체로 내 얼굴을 꼬집고 비틀었으며, 흔들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나 내 얼굴의 상처는 진물이 나왔고, 그것을 본 선생은 놀랐는지 나를 데리고 양호실로 향했다. 양호 선생님은 놀란 눈치로 “어쩌다가 이랬어요?”라고 물었고 담임은 멋쩍은 듯 웃으며 “애들끼리 놀다가 그랬나 봐요.”라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 학교를 가지 않게 되었다. 아침 일찍 등교한다는 말과 함께 나는 동네를 방황했다. 당시 유행했던 장난감 권총도 가지고 나왔다.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BB탄 총알을 주워 주머니에 한가득 담아두었다. 이후 집 근처 빌라 화단으로 가서 빈 깡통을 올려두고 총을 조준하고 발사하며 시간을 보냈다. 배가 고프면 남의 집 우유 주머니를 뒤져 훔쳐 마시고, 피로하면 빌라 뒷마당 길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5일이 흘렀다. 금요일 아침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을 나섰다. 지난번과 다름없이 길바닥에 있는 BB탄 총알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고, 깡통을 맞추며 놀다 정오쯤에 잠에 들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잠에서 깬 나는 비몽사몽에 어쩐지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 따뜻한 냄새에 눈을 떠보니 옆에 어머니가 계셨다.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이 선명하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슬픔, 애잔함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으나,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씀하셨다. “집에서 쉬고 있어, 엄마가 치킨 사 올게.” 그렇게 한참 후 누나와 함께 돌아온 어머니 손에는 치킨 봉투가 걸려 있었다.
5일이 지났음에도, 선생은 우리 집에 전화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본인 반 아이가 무단결석을 5일 이상 하고 있다면 해당 학생의 부모에게 전화하는 게 기본이다. 그럼에도 그 선생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30대의 젊은 여선생은 촌지만을 바라는 역겨운 선생이었다. 어머니가 치킨을 사 온 그날 이후, 우리 반에 있던 검사부와 청소부는 사라졌다. 그리고 선생의 차별과 학대도 말끔하게 없어졌다. 나는 아직도 그 상처를 담고 있지만, 어머니의 적절한 대처에 덧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