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의 핵심]을 읽고 에세이

<18화> 작가 - 조셉 콘래드

by 박진권



세계문학전집 7
암흑의 핵심
Heart of Darkness
조셉 콘래드 - 이상옥 옮김





[제1장]

[1] 결속감에는 나태함이 깃들어있다. 소속감에 힘입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내가 하지 않아도 결국 나와 결속되어 있는 누군가 하겠지 하는 생각은 지우기 쉽지 않다. 그렇게 게으름이 지속되어 도태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2] 이따금씩 하루의 마지막을 그냥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읽지 않고, 쓰지 않고, 걷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태함과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생각의 물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때 나타나는 잡념은 보잘것없는 문제일 가능성이 크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사념으로 치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사색에 잠긴다. 해결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절망감에 빠져도 본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난다면, 눈을 뜨고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그러나 대부분 문제 해결에 좋은 비책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땐 옆으로 슬쩍 밀어둔다. 진정한 잡념은 멀어질수록 생각조차 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해결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3] 1년 9개월 동안 강제로 바라본 바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자아냈다.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멀리 있다가도 순식간에 턱 언저리까지 물이 차오른다. 그렇게 원래 바닥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높은 성을 쌓은 바다는 다시금 순식간에 그 바닥을 드러낸다. 바다는 나에게서 무엇인가 뺏어가고 싶은 것처럼 매번 넘실거렸다.


해무가 짙은 어느 새벽. 바람은 불지 않았고, 월광도 자취를 감추었다. 바다라는 것을 인지하지 않았다면 그곳이 바다인 줄도 몰랐을 테다. 물의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짙은 해무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바다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왔고, 늘 좋아했던 새벽 바다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감싸 안을 수 있는 바다가,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괴물로 변모했다.




[4] 타인을 정복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사람이 사람을 정복하는 데 긍정은 없다. 정복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가미되는데, 어떤 관계든 폭력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이루는 과정에서는 절대로 폭력이 단초가 될 수 없고, 과정이 되어서도 안된다. 폭력은 관계의 단절만을 야기하고, 참을 수 있는 폭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5]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내야만 하는 게 괴롭다. 글 쓰는 행위에 조급함이 더해지는 이유는 그러한 사람들 때문이다. 어서 빨리 그 역겨운 사람들 틈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매번 아무렇지 않게 남을 폄하하고, 희롱하는 게 일상이 된 짐승들을 목도한다. 그 금수들은 일말의 반성도 없이 더 자극적인 비난으로 상대의 목을 조른다.


여성에 대한 성적인 농담은 기본이고, 삼십이 넘은 성인의 입에서 타인의 부모와 관련된 욕을 내뱉는다. 심지어 자신이 성희롱한 사람과 면전에서 웃고 사람 좋은 척하며 지낸다. 이것보다 역겹지 않은 일은 찾기도 어려울 테다. 한 시라도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고 싶다.




[6]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끔찍한 사건에 경의를 표한다. 덕분에 나는 끔찍한 게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고, 긍정이라 생각했던 치욕의 나날을 직시할 수 있었다. 바보같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성실한 것이 아니며, 타인의 생각에 입각해 그들의 입맛대로 놀아나는 게 배려가 아니라는 것을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었고, 해야 할 때 적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으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7] 사기성이 짙은 사람은 유난스럽게 행동한다. 손짓 발짓이 과하며, 상대의 말은 절대 듣지 않는다.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 상대를 압박하고, 결국에는 입을 닫게 만든다. 정당함과는 거리가 먼 소리를 보기 좋게 나열해 타인이 분간할 수 없게끔 만드는데, 목적은 자신의 불합리함을 숨기는 것이다. 겉으로만 보이는 정당성을 찾아 헤매는 그들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해 누구보다 인정 욕구에 목말라있다.




[8] 확신 없는 삶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미래를 유추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하는 일이 옳은 일이 아닌 것이라고 명명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하기 싫은 일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귀찮은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신을 내려놓았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받아들이고, 확신을 접어둔다. 그리고 한 시간을 더 알차게 사용하고, 하루를 보람 있게 연소한다. 그렇게 한 달이 되고, 반년이 되고, 일 년이 된다. 이내 잘 연소된 세월이 내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9] 좀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이 있다. 그 내용을 파악하려 애써봤자 고통만 밀려온다. 곱씹는 행위는 때에 따라서 부정도 될 수 있고, 긍정도 될 수 있으나 타인의 말과 관련되어 되새기는 행동은 절대 긍정이 될 수 없다. 그 말의 속뜻은 당사자만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최악의 경우에는 숨겨진 뜻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상대의 말이 모순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굳이 시간을 소모해가며 그 말의 진정한 가치를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 결국 나와는 하등 관계없는 타인의 구절일 뿐이다.




[10] 사람이 싫지 않다. 사람이 싫은 게 아니라, 관심이 덜 할 뿐이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목이 쏠리지 않으니,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흥미가 가지 않고, 집중도 되지 않는다. 눈앞에서 날 좀 봐달라며 격하게 주의를 끌수록 내 시선은 점점 더 멀어진다. 보편적인 입맛에 맞지 않는 저염식은 사람들의 선호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11] 외로움과 고독의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외로움은 타인에게서 자신을 찾는 행위고, 고독은 내면에서 자신을 찾는 것이다. 외로움은 외부에서 찾아오는 신호로서, 홀로 안정시킬 수 없는 소모성 짙은 감정이고, 고독은 내부에서 찾아오는 신호로서, 홀로 있어야만 감정의 평형을 이룰 수 있는 고갈되지 않는 순수함이다.




[12]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삼포 시대인 만큼, 돈을 제외한 모든 것에 흥미가 없다. 돈이 되는 것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자신의 재산이 불어나는 것 외에는 큰 관심이 없다.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규탄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근래의 사람들은 타인의 벌이에 이상하리만치 관심이 많다. 그러다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에 없는 요정이라도 본 듯 대한다. 당연하게도 투자를 해야 하는 이유를 일장 연설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미래와, 꿈은 안중에도 없다. 심지어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투자를 꼭 해야 한다.'라는 헛소리를 내뱉기 시작한다.


투자에 관련된 서적을 찾는데 쓰는 시간, 그 책을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 마지막으로 읽고, 이해하며 시행착오를 겪는 숭고한 세월을 존중한다. 나는 그들에게 '꿈을 찾아가라며 조언하지 않는다.' 돈을 버는 게 꿈이고, 그것에 진심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꿈을 좇는 사람만큼 빛난다. 그들에게 돈을 버는 것은 또 다른 꿈을 위해 달려가는 발판일 수도 있기에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 타인의 인생을 재단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으니까.




[13] 잠시 동안, 모든 연락에서 해방되어 보기로 했다. 카톡을 지웠고, 인스타를 삭제했다. 원래도 친하지 않았던 연락 도구와 더욱 멀어졌고, 바라지 않는 연락 모두를 보지 않으니 내면 또한 고즈넉해졌다. 그토록 바라던 삶의 한편에 조금은 다가선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떤 삶은 바랐는지, 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가끔씩 연결에 갇혔고, 연락에 묶여 있었다. 그렇게 독방보다 더한 외로움에 시달렸고, 그 어둠에 잠식되었다. 나에게 말을 걸어줄 상대는 정해져 있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는데도 연락을 기다렸다. 그리고 막상 걸려오는 전화는 받지 않았고, 글자는 보지 않았다. 누구와도 상관없으니 연관되어 있고 싶었고,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다시금 연결되어 있기 싫었다.


모순의 극치인 나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혐오가 맞물려 스스로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다. 철옹성같이 단단한 울타리 안에 또다시 사람을 들이는 게 아직은 두렵다. 언제쯤, 마음 터놓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14]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노력을 쉽게 비하한다. 자신의 노력은 피와 땀이 서린 분투라고 여기지만, 타자의 노력은 허송세월이라며 비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어떤 고역을 참아내며 인내했는지 그들은 절대 알 수가 없을 테다. 진실로, 뼈를 깎는 고통의 노력을 한 사람들은 그러한 노력에 대해서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수레는 비어 있을수록 거북하게 요란하다.




[15] 나에게 사람의 겉모습 따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예쁜 구석이 있고, 자주 보고 가까워질수록 그 모습이 극대화된다. 그래서 사람 구경이 재밌는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곁에 두고 괜찮은 모습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 모습이 눈에 선할 때까지 바라보고 기억한다. 그렇게 같은 계절을 두 번째로 맞이 했을 때 그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편안하고, 아름답다.






[제2장]

[1] 이따금씩 생각한다. 과거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이다. 그에 따른 부정적인 관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거짓일 테다. 지난 일은 다 의미가 있고, 그것을 지우는 행위는 이치에 맞지 않을뿐더러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지워졌으면 하는 기억들이 있다.




[2]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전에는 모든 게 거슬린다. 안경 착용 후 느껴지는 이질감이 거북하고, 이어폰을 착용해야 할 귀가 유난히 간지럽다. 의자는 세상 불편하며, 항상 정리되어 있는 책상은 왜 또 그렇게 지저분한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렇게 작업에 착수해야 할 시간이 30분이 훌쩍 지나서야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0.1mm 정도 길어진 손톱이 참 거슬리다.




[3] 주변에는 항상 버려야 할 것들 천지다. 쓰레기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거나 그 정도로 사용 가치가 떨어진 물건들이 있다. 내게는 야구 배트와, 글러브가 그렇다. 쓰임새 없는 물건인 것은 자명한데, 쉽게 끊어낼 수가 없다.


차 트렁크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배트와 글러브를 시작으로, 쓰지 않는 펜과 수첩들 그리고 운동용품과 옷가지, 마지막으로 쓸데없는 인테리어 물품들을 당장이라도 남김없이 모아서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 마음이 내 감정에 드리워질 때마다 몇 번이고 비워냈었다. 샐 수도 없이 버리고, 또 버리고, 다시 버렸음에도 그것들은 좀처럼 깨끗이 비워지지 않았다. 물건의 가치는 다 했으나, 그 물품에 깃든 과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도저히 모두 내던질 수가 없다.




[4] 우울한 감정은 나를 부정으로만 인도하진 않는다. 그 우울함 덕분에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고, 자아성찰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두터워진 고뇌 덕분에 고난은 놀이가 되고, 역경은 작은 돌부리 정도로 만만해지기도 한다. 부정적인 관념에 매몰되기 싫기 때문에 부정 속에서도 빛나는 한 줄기의 긍정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덕분에 노력 속에서 늘 가능성을 발견했고, 우울 속에서도 나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5] 인간이라는 호칭이 어색한 사람들 또한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에 심한 감정 동요가 일어났다. 스스로 그들을 괴물로 명명했는데, 다시금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착각은 오판으로 이어졌고, 그들은 전혀 변하지 않은 괴수 그 자체였다. 하염없이 뱉어대는 조롱과 더불어 심심찮게 나오는 인격모독의 발언은 귀를 뜯어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인간은 모두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에 국한되어 있다.




[6] 갑자기 나타난 위험신호에는 스스로의 안일함이 묻어있다. 소홀함이 짙어질수록 위험이 지각되었고, 익숙함이 깊어질수록 신호는 거세게 울렸다. 그럼에도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 채, 기어이 소홀함과 익숙함이 결합되어 새빨간 적신호를 만들어냈다. 나타난 빨간불은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다시는 청신호를 볼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고통에 절여지고 나서야 어떤 것이 신호였고, 무엇이 위험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명확해진 실수는 더 이상 두려움을 자아낼 수 없다.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어떤 상황을 피해야 하는지 몸소 체험했기에, 무서울 리 만무하다. 대비책이 두둑하게 마련되어있는 지금, 위험신호의 등장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7] 고단한 시기가 얼마나 더 흘러야 끝이 날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때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별것 아닌 일이 된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와 인지가 수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좀처럼 평안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부정적인 생각을 기반으로 울타리를 건설했고, 그 울타리는 이내 단단한 성곽으로 변모했으며, 결국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높디높은 부정의 성을 완공해냈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굴을 파고 들어가 책을 읽거나,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성안에서 홀로 글을 쓰는 게 전부였다.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했고, 누구에게도 기대를 갖지 않게 되어 숨을 쉴 수 있었다. 타인에게서 오는 행복의 대가를 더는 감내할 자신이 없다.




[8] 욕을 사용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비방의 언어로 타인을 웃기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 비난의 송곳을 자신에게 겨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다. 욕을 뱉어내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며, 나약한 정신의 방증이다.




[9] 나는 살아가면서 내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몇 개 되지 않는다. 진실로 내 것이라 믿는 것은 확고한 신념에서 나오고, 굳센 신념은 작은 믿음이 차곡차곡 쌓여서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 신념을 바탕에 두고 자신만만하게 믿었던 내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고, 그것은 존재 자체가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았고, 소유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절대로 복종시켜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내 것이라 명명하는 것은 그것의 자유를 박탈하는 근원이 되었으며, 존재 가치를 상실케 하는 악의가 되었다. 그것들은 소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매번 줄기차게 유실되기 바빴고, 소실된 것을 다시 얻어낼 수는 없었다.


본디 나의 것은 얼마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오만이었다. 세상에는 그 무엇도 내 것이 없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소유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그렇게 존중과 동등함이 무엇인지 깨우칠 수 있었다.




[10] 나는 장작 타는 냄새가 참으로 좋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장작의 향기는 설렘마저 가져다준다. 불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또는 아무 생각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행복의 근간이다. 타닥타닥 거리는 소리와 함께 춤을 추듯 일렁이는 불줄기는 사방으로 빛을 내뿜는 동시에 불쾌한 재도 흩뿌린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있다. 그러므로 나는 장작을 태우는 불이 참으로 좋다.






[제3장]

[1] 근래의 평균 수명은 백세로 크게 증가하였으나, 겨우 서른 살 에서 마흔 살 안에 있는 소인들은 '나이가 들면서', 혹은 '서른 중반이 되니까.'라며 대부분의 문제를 나이 탓으로 돌린다. 그들은 서른이 많은 나이고 서른이라서 몸이 아프고 서른이 되니까 더 피로하다는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래야만 자신의 나태함을 숨길 수 있으니까.


서른에 모든 생체 기능이 망가지고 스스로의 나이가 대단히 많은 것 같다고 느낀다면, 두 배의 나이 즉 예순이 되었을 때는 살아있을 가망이 있을까. 희망 없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내는 그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운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체력의 전성기는 스무 살 때이며, 근력의 전성기는 서른 살 때이다. 즉, 이십 대 후반부터 삼십 대 중반 까지가 체력과 근력을 모두 정점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신체의 최전성기라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일명 서른 부심이 계속해서 고개를 내미는 까닭은 무엇일까.




[2] 나는 정의롭지 않다. 누구에게나 떳떳할 순 있지만, 그것이 스스로의 정의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거창하게 정의랄 것도 없이 나는, 착하지 않다. 이타심이 크지 않아서인지, 사지 멀쩡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은 조금도 없다. 더욱이 장애인과 학대받는 아이들 그리고 힘없는 노약자들 모두를 구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불행에 차등을 나누는 선택을 감행했다. 봉사의 범주를 지정해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정해진 만큼만 행동했다. 이제는 그러한 행위가 누구를 위한 행동인지, 정확히 분별할 수도 없다. 내게 봉사는 과시이자 허세다. 이타심에서 나오는 선한 마음이 아니라, 개인의 욕구에서 흘러나오는 공허일 뿐이다.




[3] 애정에 결핍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사랑을 마음껏 줄 수 있다. 그들은 사랑받는 방법을 몰라서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느껴질 땐 스스로를 불태우며 뒤도 보지 않고 한 사람에게만 모든 것을 다 바친다. 절대 한 눈 팔지 않으며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꿈도, 희망도, 모두 내다 버릴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단점은 스스로의 가치를 쓰레기와 나란히 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누구보다 수월하게 해내지만, 반대로 타인의 사랑을 받는 것은 대단히 어려워한다. 그렇게 상대방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고, 가치가 다 한 자신을 내치도록 유인한다. 온갖 멍청한 행위를 다 동원해서 말이다.


사랑은 이유를 불문하고 동등해야 한다. 사랑에는 갑과 을이 존재해선 안되며, 승리와 패배의 기준을 만들어선 안된다. 이기고 지는 것은 경쟁이지 사랑이 아니다. 밀고 당기는 것은 자력 그 자체일 뿐 결단코 사랑이 아니다. 완전히 동등할 수는 없지만, 갑이 되지 않을 수는 있다. 명령의 틀에 복속된 사랑의 모양새는 절대로 아름다울 수 없다. 그것은 괴이한 마음일 뿐 애정이 아니다.




[4] 한 번뿐인 인생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건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삶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오롯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휘둘리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알 수 없는 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현재의 행복은 내일의 행복과 다르고, 지금이라는 시간은 다시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의 시기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고 미루며, 미래를 도모하는 것은 바람직할 수도 있으나, 행복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사소한 결핍에 우울해지고, 나락으로 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2030의 행복을 갈아서 4050의 행복을 채운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젊음은 대단히 짧으나 100년의 세월 중 가장 찬란하다. 그 시기를 꿈도 없이 그저 돈에만 매몰되어 무채색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깝다.




[5] 내 인생에서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어떤 사람과의 만남과 유대감 그리고 끊어짐과 고독의 시점 모두를 기억한다. 그 추억은 저장하려 애쓰지 않아도, 모든 상황이 완벽하게 머릿속에 그려질 정도로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덕분에 꿈을 찾을 수 있었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가는 데 망설임이 사라졌다. 할 수 없다는 생각보다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온몸을 지배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에 긍정적이었던 나에게 인간에 대한 긍정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에게 무한한 영광을 돌린다. 진심으로.




[6] 모든 부정은 나에게서 온다. 좋지 못한 일과 상황, 그리고 행동과 언행은 모두 나의 잘못이 분명하다. 아무런 근거 없이 자책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타인의 실수나 잘못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타인의 잘못으로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 타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문제의 원인을 찾거나 떠넘길 수는 있지만, 해결방안을 찾을 수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해결책은 자신의 생각에서 흘러나온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가장 잘 풀어낼 수 있고, 본인이 불안한 이유는 스스로 가장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높디높은 장애물 앞에서 남 탓을 해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의 장벽을 넘기 위해선 당당하게 맞서는 방법이 최선이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방안은 자신의 줏대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7] 책을 다 읽고 덮으면 멍해질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으로 깊게 빠질 땐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다. 오직 추억을 속삭이는 아련한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 뿐이다. 뜻하지 않은 과거의 나래는 추억 속 여러 갈래의 길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만든다. 기쁜 일, 슬픈 일, 좋은 일, 나쁜 일, 행복, 절망 그리고 극복의 기억들을 다시금 되새긴다.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연료는 책이고, 그것을 알차게 연소케 만드는 것은 깊은 생각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사색에 잠긴 채 행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8] 세상 모든 흉악범들에게 보내는 동정의 싹을 자르고, 연민의 시선을 도려내야 한다. 세상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삶은 없으며, 범죄를 택한 것은 스스로의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 짐승 같은 행동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 폭력이 힘이었던 고대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중 폭력을 옹호하는 인간은 지적 능력이 우수하게 떨어지거나, 폭행 전과가 있는 금수일 확률이 높다.


정당방위는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도한 방어 행위는 결국 또 다른 폭력이기에 금하는 게 옳고, 그런 극단적인 예로 흉악범을 비호하는 태도는 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각기 다른 범죄의 경중을 모호하게 만들어 흉악범죄를 변호하는 행위는 비열하고 저열한 인간임을 자처하는 괴물 같은 짓이며, 절대 해서는 안될 처참한 발언이다.




[9]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사람들의 내면은 누구보다 어둡다. 그들의 빛은 주변의 어둠을 순식간에 종식시킬 수 있을 만큼 밝고 따뜻한데 반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빛을 머금은 그들은 애정 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독히도 어둡다면,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기 위해 흔쾌히 스스로를 태운다. 내면 속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결국 재만 남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사랑을 위해 멈추지 않는다.




[10] 한 줌의 긍정을 가슴속에 품고 온갖 부정의 칼날 숲을 헤쳐나가던 시기가 있다. 그 시기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공포만이 나를 사로잡았고, 선명했던 하루가 희미하기만 했다. 각성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몸무게는 끝을 모르고 떨어져만 갔다. 수면 시간은 두 시간도 채우기 버거웠으나, 피로함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하루가 늘 희미했으나, 당시의 고통은 선명하다. 괴로움으로 점철된 시기조차 성장의 발판이 되었고, 그것을 버텨낸 나는 작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다시금 한 줌의 긍정과 작은 승리를 가슴에 품고, 다음 시련을 이겨내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은 항상 보답을 하기 때문에 절대로 멈출 수가 없다.




[11] 차라리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에게는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과거가 있으며, 가슴이 저밀 정도의 아련한 추억도 있다. 그렇게 지난 일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망각할 수도 없다. 없었으면 하는 일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그 기억은 평생 나를 쫓아다닐 것이다. 내 인생이 철저하게 망가질 때까지 말이다.




[12] 해야만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되었을 때를 기억한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 도래한 시점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믿고 성실하게 이행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성과를 얻어냈고, 고양감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작은 결실도 스스로에게 엄청나게 큰 긍정의 힘이 된다는 것을 깨우쳤다.


아직도 무수히 많은 꿈들이 남아있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쟁취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자, 하고 싶은 일이다. 작은 결실 이후 찾아오는 긍정을 수집하고, 나중에는 어린 새싹들에게 긍정을 나누어줄 수 있는 대인이 되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쓰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13] 수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얻은 것이 보잘것없을 때 오는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쩌면 그 모든 일들은 비참함을 담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에 따라서 결과 또한 없을 무가 되었으니, 어떤 결말이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한 실패에도 모든 과정에는 이유가 있다는 자위를 하며 또 다른 계획을 위해 다시금 희생을 준비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14] 어떤 사람들은 의지하는 게 버릇이 되어있다. 가족에게, 연인에게, 친구에게, 누구에게든 의존하고 싶은 욕망을 내비친다. 상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놓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비워낸다. 그렇게 쓰레기가 가득 차서 버려야 할 때는 가차 없이 내다 버린다. 상대의 기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채 말이다.


오랜 기간 감정 쓰레기통으로 지낸 사람들은, 그것을 비워낼 방법을 잊는다. 상대가 차곡차곡 쌓아둔 역겹고 부정탄 쓰레기들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언젠가는 비워지겠지 하며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이다.






[작품 해설]

[1] 탐욕적인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심각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사회에서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싶다는 것은, 남들의 것을 서슴없이 빼앗겠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부자가 되려 하지 말라는 의견도 아니다. 그저 스스로의 그릇을 아득히 넘어서는 탐욕을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자신의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으로서의 품격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들은 상대적인 빈곤에 사로잡혀 타자의 고통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적자생존을 외치는 반면 각자도생을 등한시한다. 이내 역겨운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타인의 꿈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감 없이 선보인다.




[2] 삶의 전반적인 지혜와 더불어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은 평생을 노력해도 얻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단순한 게 좋을 때도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땐 그렇지 않다. 해서 타인을 알아갈 때 가장 좋은 질문은 '삶을 살아내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위의 질문은 대답을 하지 못해도, 그 자체로 대답이 되는 기이한 형국을 그리기도 한다.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지, 얼마나 깊은 사색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삶을 살아내는 이유에 대한 대답 중 가장 뇌리에 깊게 각인된 대답이 있다. 바로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산다는 응답이었는데, 그것이 참으로 담백하며 꾸밈없는 느낌이 들어 아직까지도 가장 인상 깊은 대답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대답을 하는 상대의 눈동자에는 깊은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3] 노력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사랑한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적인 환경의 격차가 존재하고, 각자의 환경 속에서 노력하는 만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노력을 숭배한다. 노력마저 부정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