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뒤틀린 주사 심한 아버지가 밥상을 뒤엎듯 그레이스는 팔을 부들부들 떨며 보드게임판을 뒤집어버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승부욕의 화신 그레이스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실력으로 하는 게임이라면 슬쩍슬쩍 눈치 봐가며 져줄 수 도 있었겠지만 가위바위보나 주사위를 굴려서 하는 등의 확률로 하는 게임은 승패조작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엄마나 아빠가 이길 때도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레이스는 자기가 이길 때까지 절대 멈추는 일이 없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아무도 못 떠나게 하며 눈에 쌍불을 켜고 계속 게임을 이어나갔다. 하다 하다 안되면 마지막은 게임판을 뒤엎는 걸로 분위기 험악한 강제 마무리를 하며 엄마 아빠의 속 깊은 한숨을 불러일으켰다. Happy로 시작했으나 Sad로 마무리되는 정해진 결말.
"나 안 할래요!"
분명히 하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안 하겠다고 하는 건 무슨 심보인지.
수영을 배우러 갔는데 한 조에 여자가 자기뿐이었다. 그런데 안 하겠다는 이유가 여자가 한 명이라서가 아니라 자기가 수영을 제일 못할 거 같아서 그렇단다. 잘하는 것만 하고 싶어 하는 아이라니. 시도조차 해볼 생각을 안 하는걸 보니 근심이 깊어졌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잘 못해도 된다고 전혀 상관없다고 타일러도 자기의 자존심이 허락을 안 하는 듯하다. 적당한 승부욕이면 동기부여도 되고 발전의 계기도 되겠지만 과하게 넘치는 게 문제였다. 남들과 매번 비교해서 우월이나 좌절을 느끼는 삶은 얼마나 피곤하고 불안할 것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놓치게 되는 것일까? 보상을 걸어보았다. 수영하고 온 날엔 다이소에 가서 원하는 거 하나 사기. 보상에 혹 해서 아이는 수영을 시작했다. 두 번쯤 다이소에 간 뒤로는 더 이상 갈 필요가 없어졌다. 수영하는 거 자체가 즐거워졌기 때문이었다.
"나 회장 선거에 진짜 나가고 싶은데 떨어지면 어떡하죠?"
유치원 7세 반 시절 선거를 경험해 보는 회장선거가 있었다. 학부모까지 투표에 참여하는 제대로 된 선거였다. 회장 후보 지원을 받고 후보는 자신을 지지하는 선거 운동원들을 모집한 뒤 피켓과 선거송을 만들어 5,6세 반을 찾아다니며 투표를 독려하는 등 열띤 선거운동을 하는 선거주간이 생겼다. 원장님은 선거관리 위원회에서 기표소까지 빌려오셨다.
회장이 되고 싶은 마음과 떨어지는 건 또 너무 싫은 두 마음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갈등하는 게 보였다.
"그레이스야 회장이 되면 천 원, 떨어지면 만원 줄게. 어때? 도전해 보겠어?"
그레이스 입장에선 떨어져도 거금 만원이 생기는 것이니 용기를 내볼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떨어져도 또 다른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니 그리 큰 타격은 안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만원이란 말에 급 화색이 돌며 부담 없이 후보에 등록했다. 공약도 야무지게 세우고 치열하게 선거운동을 하여 일일 회장 당선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고 엄마가 주는 축하금 천 원을 받았다.
그 뒤로도 몇 번을 이런 식으로 실패했을 때에도 또 다른 좋은 보상을 줌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하고 싶은 일은 도전을 해 보도록 유도해 보았다. 어릴 땐 눈에 보이는 보상으로 동기부여를 해주었지만 아이도 자라 가며 이젠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해보는 쪽을 훨씬 더 많이 선택하는 쪽으로, 도전해 보는 쪽으로 점점 변해가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남들이 나에게 그리 큰 관심이 없어 내가 실수를 해도 그럭저럭 지낼만 하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나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차츰차츰 받아들이게 되었다.
"떨어지면 이 틀 정도만 X 팔리면 되지 뭐"
올해 초등 6학년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겠단다.
공약을 작성하고 방과 후 컴퓨터에서 배운 PPT 실력으로 포스터를 만들어 학교에 보내고 하나부터 열까지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진행을 하였다. 4,5, 6학년 앞에서 공약을 발표하고 난 뒤 다리가 너무 후들거려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고 후일담을 들려주었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도전한 태도에 더욱 진심 어린 칭찬을 해주었다.
그레이스는 전교회장에 당선되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실수와 한계를 드러내는 일에 두려움을 갖지 않아야 한다.
가장 많은 실수를 드러내는 사람이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것들을 보여주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지, 부끄러워할 이유가 아니다.
우리는 매일 두 개의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오늘 대담하게 뛰어들었는가?'
'나는 편안함 대신 용기를 선택하기 위해 어떤 취약성을 드러내고 감수했는가?'
타이탄의 도구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소심하고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나이가 많다고 스스로 위축되는 나에게.
그레이스에게 썼던 방법을 내 안의 아이에게도 써 봐야 할 것 같다.
"하고 싶은 일 있으면 도전해 봐, 실패하면 어때? 실패할 때마다 집밥 하지 말고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