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여행기 2
버스를 타고 런던 서부에서 도심 방향으로 들어간다. 갈수록 건물의 모습도 달라지고 건물의 높이도 5~6층 정도로 높아졌다. 어느 지역에 들어서자 갑자기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들의 대규모 전시장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물론 현대와 기아도 상당히 큰 규모의 전시장을 운영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롤스로이스, 벤틀리, 페라리 등 초고가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의 플래그십 매장은 주로 런던 중심부의 메이페어 지역에 위치하고, 이곳은 서부 런던의 브렌트포드(Brentford) 지역으로 대중적 자동차 브랜드들의 거점이라고 한다. 한국 브랜드의 커다란 광고판을 보면 괜히 뿌듯해지는 기분이다.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맞는 말인가 보다.
가는 도중에 런던 현지 가이드가 버스에 올라탔다. 연세가 많아 보이는 여성분이었는데, 버스에서 마이크를 들자마자 엄청난 활력(텐션)이 터져 나왔다. 원래 타고난 입담꾼인지 오래 가이드를 하면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녀의 설명은 귀에 쏙쏙 들어오고 아주 재미있었다.
그녀는 30여 년 전에 영국에 왔다고 한다. 분위기 있는 유럽 노천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로망을 가지고 있던 터라 런던에 도착하여 근사한 카페가 들어갔다. 마침 꽤 좋은 자리가 있길래 바로 앉아 종업원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종업원이 오지 않더란다. 일어나 매장 안으로 가려니 좋은 자리를 놓칠 것 같아서 계속 앉아 있는데, 마침 종업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커피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Excuse me. Can I have a latte, please?"
그 남자에게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그 남자는 매장 안으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거기에는 ‘Self Service’라고 붙어 있었다. 사실 그 남자는 카페 직원이 아니라 손님이었다. 한국에서는 셀프서비스 개념이 낯설었던 시절이라 그녀가 그를 종업원인줄로 착각해서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결혼하여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결혼할 때 남편의 연봉이 높고 런던에 집이 있다고 해서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연봉은 세전이라 높은 세율로 세금을 공제하고 나면 그리 많지 않았고, 또 모기지로 산 집은 사실상 은행의 소유였다며 웃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살아가는 데에 경제적으로 크게 힘들지 않다고 하였다. 세율이 높은 만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복지가 잘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결혼 무렵보다 소득세율이 더 올라 지금은 50%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한다.
흔히 북유럽국가들이 세율이 높고 복지가 잘 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서유럽의 많은 국가도 미국보다는 북유럽 국가 시스템과 가까운 모양이다. 아, 맞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를 상징하는 슬로건도 영국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최근에는 영국 경제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많이 들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리가 참고할 점도 많다.
하이드파크로 가는 길에 영국의 집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영국에서는 옛 모습 그대로인 건물일수록 비싸다고 한다. 영국 사람들은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짓기보다는 외관은 그대로 두고 안을 고쳐 쓴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어제 본 히드로 공항의 낡은 시설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사용에 큰 문제가 없으면 전통 그대로 활용하는 영국인들의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버스가 하이드파크에 도착했다. 하이드파크는 매우 넓었다. 그 규모만 보아도 왜 유명한 도심 공원으로 뉴욕의 센트럴파크와 함께 손꼽히는지를 짐작케 한다. 겨울이라 나뭇잎은 대부분 떨어졌지만 잔디는 여기도 역시 초록색이었고, 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많은 시민들이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또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띄었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근처에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알버트 공을 기리는 로열 알버트 홀과 그의 기념비가 있었다. 알버트 기념비는 화려하고 거대한 황금빛 동상 모습이었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빅토리아 여왕은 1861년에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남편을 기리기 위하여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알버트 공의 손에는 그가 주도했던 1851년 만국 박람회의 안내장이 들려있었다.
영국에서 'Royal'이라는 단어는 아무 곳에나 쉽게 붙일 수 없으며, 엄격한 규정과 허가 절차를 거쳐야만 사용할 수 있다. 'Royal'이라는 단어가 영국 왕실과 군주제를 상징하는 중요한 명칭이기 때문에, 그 품위와 권위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Royal'이라는 단어가 붙은 영국 브랜드나 기관은 영국 왕실로부터 그 품질이나 중요성을 공적으로 인정받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왕실에 최소 5년 이상 꾸준히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품질을 인정받아야 하며, 주기적으로 심사를 거쳐 갱신해야 한다. 인증이 취소되면 왕실 휘장과 관련 문구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나니 '로열' 알버트 홀이 더 대단해 보인다. 실제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 공연장에는 아무나 무대에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매년 여름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리는 BBC 프롬스에 여러 번 출연하여 런던 청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소프라노 조수미도 공연한 적이 있다. 글을 쓰고 있는 2025년에는 한국의 젊은 거장 피아니스트 임윤찬도 공연을 한 적이 있는 유명한 무대이다. 그런데 매우 상징적이고 대관료가 높은 이 공연장에 한국의 종교 단체인 OO교가 대관하여 대규모행사를 개최한 적이 있다는 설명에 깜짝 놀랐다.
버킹엄 궁전으로 이동하였다. 가이드는 30년 넘게 그렇게 궁전 앞을 오갔는데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신에게 빈말이라도 한번 들어오라고 하지 않더라며 너스레를 늘어놓는다. 여행 당시에는 찰스 왕세자가 국왕 즉위식을 앞두고 있었는데 국민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다고 했다. 영국은 국왕의 얼굴로 지폐 도안이 이루어지는데, 못생긴 찰스 얼굴이 그려진 지폐를 쓰기 싫다나. 게다가 교체 비용으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데 나이가 많은 찰스는 왕위에 머물 날도 길지 않아 또다시 교체해야 하지 않느냐면서. 아마도 그의 불륜 스캔들과 다이애나 왕세자비에 대한 영국인들의 호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특히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후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고 있다. 찰스 3세는 국왕으로서 공무를 수행하며 점차 대중의 지지를 회복해나가고 있다. 즉위 이전의 낮은 지지율은 현재 많이 상승했고, 카밀라 왕비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시각도 많이 누그려진 모양새다.
하지만 왕실 구성원 중 윌리엄 왕세자 부부의 인기가 훨씬 더 높은 것도 사실이다. 왕자와 평민 여성이 대학에서 만나 오랫동안 연애한 끝에 결혼한 동화 같은 스토리가 좋은 이미지 형성에 기여했다. 또한 다이애나비처럼 따뜻함과 공감 능력을 보여주며 대중과 소통하려는 모습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우리가 찾아간 이날은 국왕도 없고 찰스 왕세자(당시)도 연말 휴가 중이라 근위병 교대식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버킹엄궁 앞 광장에는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버킹엄궁을 배경으로 인증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버킹엄 궁전 정문 앞에는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의 장기 재위와 그녀의 통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여왕의 조각상 및 여러 상징적인 조각상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기념비의 꼭대기를 황금빛으로 장식하는 승리의 여신 니케 상이다. 사람들은 이를 배경으로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아무래도 빅토리아 여왕보다는 일반인들에게 승리의 여신 니케나 '나이키'라는 스포츠 브랜드 이름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버킹엄궁전 앞에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St. James's Park)가 펼쳐져 있다. 이 공원은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왕립 공원 중 하나로 아름다운 호수(The Lake)가 중앙에 길게 자리 잡고 있다. 호수에는 다양한 종류의 오리와 새들이 서식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구경도 하고 먹이도 준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인 블루 브리지(Blue Bridge)에서 바라보는 버킹엄 궁전의 모습이 유명하다고 해서 우리도 건너가며 보았다.
호수를 따라 기마병 교대식이 열리는 호스 가즈 퍼레이드(Horse Guards Parade) 지역으로 걸어갔다. 이 교대식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몰렸다. 운 좋게도 딱 맞은 시간에 도착한 덕분에 구경할 수 있었다. 빨간 제복을 갖춰 입은 기마병들이 마주 보고 쭉 늘어서 있는 모습이 굉장하다. 말을 타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는 충분하다.
구경을 마치고 빅벤을 향해 호스 가즈 로드(Horse Guards Rd)를 따라 걸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미술관과 관공서 앞을 달리는 분홍색 자동차가 이국적이다. 아름다운 거리를 걷는 기분이 즐겁다. 영국에 온 것이 실감 난다.
다음 주에 런던 여행기 3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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