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를 찾아 오름에 오름

제주 오름 여행 4 | 걸서악 탐방기

by 새벽강

겨울의 제주는 귤 천지다. 길을 걷다 보면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러운 귤나무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잠시 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리면 풋풋한 귤 향기가 겨울 공기 속에 섞여 들어오는 듯하다. 귤 인심도 좋아서 식당 입구에 놓인 귤 상자는 대기하는 손님들의 마음을 달콤하게 달래준다. 제주를 가득 채운 주황빛 물결은 겨울 풍경을 더욱 따스하고 정겹게 만든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지난 겨울에 제주를 찾았다. 해마다 교무실의 멤버는 달라지는데, 분위기가 특히 좋았던 그 해는 학년이 끝나도 자연스레 모임으로 이어졌다. 한 해 동안 교무실 선생님들은 참 즐겁고 사이좋게 지냈다. 서로 다른 나무들이 모여 있는 향기로운 숲 같았다.


다 같이 묵을 숙소를 남원에 잡았다. 서귀포시 남원읍은 제주도에서도 귤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자, 한라산 남쪽이라 겨울에 가장 따뜻한 곳이다. 제주도민 유투버 머랭하맨은 도민들은 귤을 서로 주고받는 문화가 있어서 사 먹지 않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도민이 아니라 육지에서 온 여행객인 우리는 '내돈내산'으로 귤 따기 체험을 하기로 했다. 우리가 숙소에서 먹을 귤도 따고, 귤밭 안에 있는 카페에서 따뜻한 차도 마시는 걸로.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가까운 귤 따기 체험장으로 향했다. 귤밭 사이에 있는 카페로 들어가 메뉴판을 살펴본다. 제주도에만 있을 법한 메뉴들에 눈길이 간다. 주문을 마친 뒤 몇 달 만에 만난 동료들은 그간의 이야기 타래를 풀어놓는다. 언제 만나더라도 마음 편히 담소를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게다가 제주도에서 함께하는 시간이니 좋은 분위기는 더 말해 뭐 하랴.


카페에서 주문한 음료 뒤로 멀리 걸서악 전망대가 보인다


허름한 듯 멋스러운 창고는 아늑한 카페로 변신해 독특한 감성이 남아 있다. 색이 예쁜 음료 사진도 찍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귀여운 인형과도 함께 찍어 본다. 카페 을 배경으로도 찍다 보니 창밖의 풍경이 명화 같다. 카페 창문은 액자틀이 되고 귤나무들은 액자 속 그림처럼 서 있다.


그런데 그 명화의 배경에 높지 않은 언덕이 보인다. 손이 빠른 동료가 검색을 하니 걸서악이라는 오름이다. 겨울이지만 제주도의 따뜻한 날씨는 오름 오르기에 더없이 좋다. 예정에 없던 오름 등반이지만 다들 좋다고 한다. 느긋하게 카페를 나서 오름 입구로 향했다.


입구 안내도에 따르면 '걸서악'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산 모양이 마치 문을 걸어 잠그는 걸세(걸쇠)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걸세오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오름은 두 개의 원추형 화산체인데, 마을에서는 남서쪽 봉우리를 '서걸세', 북동쪽 봉우리를 '동걸세'라고 부른다.


걸서악은 걸세를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오른다. 해발 156미터의 낮은 오름이라 걸쇠의 정상까지 금방 도착한다. 그리 높지 않지만, 오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발아래 펼쳐진 남원읍의 귤밭과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제주 남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귤밭과 푸른 바다는 겨울 제주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우리는 따뜻한 햇살 아래 한참 동안 아름다운 제주 풍경을 마음껏 누렸다.

섶섬과 제주 앞바다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걸서악 전망대

고은 시인의 시 <그 꽃>처럼, 전망대에 올라올 때 못 본 현수막을 내려오는 길에 보았다. 현수막에는 '나를 찾아 오름'이라고 적혀 있다.


'저 멋진 구절은 뭘까?'

찬찬히 보니 '생태힐링 프로그램/ 오름 올랑 낭에 올랑'이라는 작은 글씨도 눈에 들어온다. '낭'은 '나무'의 제주도 표현이다. 오름에도 오르고 나무에도 오르는 힐링 프로그램이 있나 보다. 또다시 출동하신 '검색의 신' 동료가 찾아보니, 이곳 하례마을은 서귀포에서도 가장 먼저 귤꽃이 피어나는 지역이란다. 2014년 생태 관광 마을로 지정된 이후,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하례마을만의 스토리를 개발하여 다양한 형태의 마을축제를 선보여 오고 있다고.


오름 전망대에서 돌아내려오다가 발견한 현수막 글귀



별씨 하례마을

'삶을 여행하는 당신, 그리고 별씨 마을에서 만나는 나'

이곳은 대한민국 제주 서귀포 남원읍 하례리.

이 마을은 정령의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사는 것들은 모두 정령입니다.

돌 하나, 나무 하나,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까지 모두가 정령으로 사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당신이 이곳에 와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이 정령마을에는 당신을 꼭 닮은 정령이 하나 살고 있습니다.

당신이 천진난만한 어렸을 적에 그 모습 그대로,

당신이 어른이 되면서 잊어버린 그 아이가 이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복잡한 마음이 무언가를 더욱 꼬이게만 할 때.

내가 뭐 하고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을 때.

그래서 스스로의 마음에 솔직히 물어보고 싶을 때.

이곳에서 당신의 첫 마음을 만나보세요.


하례마을은 왜 정령마을인가요?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믿고 사는 생명들이 생태마을 하례마을에 모여 삽니다.

사람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깃들어 살며 서로를 정령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정령’은 생명이고, 존재입니다.

- <출처: 하례마을 홈페이지>




어떻게 이 작은 마을에서 최고의 귤도 열리고 멋진 행사도 열리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다음에는 이 마을 프로그램 '나를 찾아 오름'에 한번 참여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첫 마음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정령을 만나기 위해서.


귤꽃이 가장 먼저 피어나는 하례마을과 걸서악. 제주 남원에는 이렇게 작지만 멋진 오름과 마을이 있다. 오늘 옛 동료들과 걸서악에 올라오길 잘했다. 우리도 서로에게 깃들어 살아가는 생명이고 소중한 존재들이니까. 오름에서 내려온 우리는 따뜻한 온기를 나누기 위해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반갑게도 작고 귀여운 귤들이 식당 입구에서 우리를 맞아 주었다.



술이 아니면 어떠랴, 톳칼국수로 건배!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