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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미끄럼틀 타고 나주 곰탕 한 그릇

전남 나주 여행기

by 새벽강
가장 마지막으로 미끄럼틀을 타 본 적은 언제인가요?


어른을 위한 미끄럼틀

어릴 때 누구나 즐겨 타던 미끄럼틀, 어른이 되고 나서는 좀처럼 탈 기회가 없다. 딸아이가 어릴 때 아파트 놀이터에 따라간 기억이 마지막이다. 그런데 그 막내딸조차 대학생이 된 올해 봄, 온 가족이 미끄럼틀을 타러 갔다. 그것도 무려 길이가 약 100m에 달하는 아주 긴 돌미끄럼틀. 이게 실제로 가능한 곳은 바로 전라남도 나주이다.


5월 나흘 간의 황금연휴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특별한 가족 여행 계획은 없었다. 연휴가 다가오자 "이렇게 동시에 시간이 맞는 경우도 자주 없으니, 어디든 함께 다녀오자"라고 제안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이 가보지 않은 지역을 각자 추천한다. 모두 좋은 곳들이지만 문제가 생겼다. 황금연휴 기간이라 그 지역의 모든 숙소가 예약 마감된 상태였다.


처음 가보는 나주

미리미리 준비하는 '얼리버드'가 되지 못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여행 날짜에 아직 숙소 예약이 가능한 도시를 찾아보니 나주가 눈에 들어온다.

알다시피, 조선 팔도의 명칭은 해당 지역 큰 도시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에서 각각 유래되었다. 나주는 전주와 함께 전라도 이름이 유래된 도시다. 지금은 전라남도의 중소도시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중심도시였다. 영산강 덕분에 물자와 사람이 모이는 교통의 요지였고, 조선시대의 중요한 목(牧)으로서 역사적인 공간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최근에는 광주전남 통합 혁신도시도 나주에 자리 잡았다.


이번 여행은 거꾸로다. 숙소를 먼저 정한 후 여행지를 알아본 방식처럼, 나주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아보았다. 나주에는 크게 나주 원도심과 신도시인 빛가람 혁신도시로 나뉘어 있다. 원도심에서는 읍성, 금성관, 나주향교, 영산포 홍어거리 등을 돌아보고 영산강에서 황포 돛배를 탈 수 있다. 그리고 빛가람 혁신도시에서는 호수 공원과 전망대를 구경할 수 있다.

빛가람전망대에서 바라본 빛가람 호수와 나주혁신도시 전경


빛가람호수공원과 돌미끄럼틀

광주를 지나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드넓은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나주평야인 모양이다. 들판 사이로 자동차전용도로가 나주혁신도시까지 잘 닦여 있다. 넓은 도로에 비해 교통량이 많지 않아 운전이 편하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곧장 빛가람 전망대로 향했다.

다양한 색깔의 조명이 화려한 빛가람호수공원의 밤 풍경

요즘 많은 신도시가 그렇듯 여기도 호수 공원이 있다. 하지만 호수 공원의 한가운데에 전망대가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숙소 바로 앞이라 호수공원을 한 바퀴 산책한 후 전망대에도 올라가 보기로 했다. 그리 높지 않은 산 위에 전망대가 있어서 걸어 올라가도 되지만, 1,000원을 내면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고 한다.

뜻밖에도 매표소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려올 때 모노레일을 타도 되지만, 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수 있다. 돌 미끄럼틀이라니! 이것 역시 요금은 단돈 1,000원. 호기심이 발동해 온 가족이 다 타기로 했다.


전망내 내부(좌), 전망대 안에는 설치미술 작품도 전시하고 있어 관람가능하다(우)


작고 귀여운 모노레일과 엘리베이터를 통해 전망대에 도착했다. 호수공원과 신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광주와 전라남도가 함께 만든 혁신도시답게 적지 않은 면적에 도시가 깔끔하게 들어서 있다. 여러 공기업 건물 중에 빛가람이라는 도시 이름에 어울리는 한국전력 본사 건물이 가장 눈에 띈다.

전망대 높이가 높지 않음에도 평야지대라 모든 방향으로 멀리까지 전망이 트여있다. 평야를 둘러싼 산들에 대한 안내가 잘 되어 있다. 도시와 주변 풍경도 평화롭고, 호수의 분수는 여유롭게 물줄기를 뿜어낸다.


돌 미끄럼틀 입구에서 장비를 착용하고 찍은 사진

드디어 돌 미끄럼틀을 탈 차례다. 조금 길이가 긴 놀이터 미끄럼틀을 생각했는데 가볍게 볼 게 아니다. 안전요원들의 안내를 받고 머리와 팔꿈치, 그리고 엉덩이에 보호 장비까지 착용해야 한다. 웬만한 놀이기구 수준이다. 딸, 아들, 아내가 차례로 입구에 앉더니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졌다.


"야아!"

가족들의 즐거운 비명을 들으며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미끄럼틀 입구에 앉았다. 그리고 앞을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경사도가 높고 코스가 휘어져 있다.

'어, 장난 아닌데!'

정확히 시간을 재지는 않았지만 한참 내려온 것 같다. 살면서 타본 가장 인상적인 미끄럼틀 경험이었다. 살짝 과장을 보태자면 엉덩이로 타는 롤러코스터 같다고나 할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던 이 특별한 미끄럼틀 덕분에 가족들의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나주 금성관과 곰탕

나주에 왔으면 나주 곰탕은 먹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저녁 식사로 구 읍내에 가서 곰탕을 먹기로 했다. 읍내 한쪽 거리에 나주곰탕집이 몰려있다. 가장 유명하다는 식당을 찾아갔더니 예상보다 대기 줄이 길다. 기다리면서 근처를 돌아보기로 했다. 식당 바로 가까이에 금성관이 있었다.


안내판에 따르면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정청이라고 한다.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던 곳이다. 조선시대 객사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현판의 '금성관' 글자가 매우 크고 멋있었다. 구경하고 있는데, 지역 주민 한 분이 다가와서 설명을 해주신다. 현장감 있는 문화유산해설이다.


나주목사가 거주하던 나주목사 내아를 거쳐 서성문(영금문)으로 걸어간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늠름하다. 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많이 훼손되었으나, 현재 남고문(南顧門), 동점문(東漸門), 영금문(暎錦門), 북망문(北望門) 등 4개의 문과 성벽 일부가 잘 복원되어 있다. 오래된 도시의 향기가 물씬 느껴진다. 천천히 걸어서 나주향교를 돌아 식당으로 오니 어느새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맑은 국물이 특징인 나주 곰탕

나주 곰탕은 일반적인 곰탕에 비해 국물이 맑은 것이 특징이다. 나주 곰탕 한 그릇에는 나주의 깊은 역사가 담겨 있다. 조선시대 전라도의 물류 중심지였던 나주는 자연스럽게 5일장이 크게 발달했고, 많은 상인들이 오갔다. 이들에게 든든한 한 끼를 제공할 수 있는 국밥이 장터 명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나주는 소 도축과 육류 가공의 중심지였다. 특히 일본이 쇠고기 통조림 공장을 세우면서, 주요 부위를 통조림으로 만들고 남은 부산물을 버리기 아까워 푹 끓여 먹기 시작하면서 곰탕이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슬픈 역사가 담긴 음식이지만, 이를 통해 서민들의 중요한 식사 메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반적인 곰탕은 소의 사골을 푹 고아 국물이 뽀얗고 진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나주 곰탕은 뼈를 사용하지 않고 고기로 국물을 우려내어 맑고 시원한 맛을 낸다. 여기에 미리 지어 놓은 밥에 뜨거운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 따라내는 토렴을 거쳐 밥알이 뭉개지지 않고 깔끔한 식감을 유지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독특한 조리법이 나주 곰탕만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뽀얀 사골 곰탕을 더 좋아하지만, 나주에 왔으면 맑은 곰탕 한번 드시길 권한다.


돌 미끄럼틀 타고 나주 곰탕 한 그릇 뚝딱하고 숙소로 돌아온다. 빛가람 호수공원의 전망대가 이름에 걸맞게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반짝인다. 나주는 어둠에 서서히 스며들고, 나는 나주에 가만히 스며드는 밤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다시 들린 호수 공원의 버스킹 장면(좌)과 다람쥐 조명(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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