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한 군부대 방문기
옛날에 복무한 군부대를 다시 찾아가 보셨나요?
별다른 일정이 없는 하루가 생겼다. 집에서 푹 쉬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보내기엔 이 흔치 않은 날이 아깝기도 하다. 뭘 하면 좋을까? 하지만 특별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기차를 한번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장마로 한껏 물기를 머금은 초록 들판을 보고 싶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뚜렷한 행선지도 없이 기차역으로 향한다.
역에 도착해서 대전역으로 가는 열차표를 예매한다. 대전은 '노잼 도시'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기차를 타고 가기에 더없이 좋다. 대구에서 대전 사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열차가 수시로 있다. 빨리 도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오늘은 무궁화호가 당첨! 기차 안에 머무르는 시간도 길거니와 요금도 저렴하다.
"잠시 후,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번 타는 곳으로 들어오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플랫폼에 안내 멘트가 나오자, 잠시 후 전조등을 환하게 비추며 무궁화호 열차가 들어온다. 공항의 설렘과는 또 다른 낭만과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묵직한 굉음이 잦아들고 끼익 하고 멈춘 기차에 올라탄다.
'아, 이 냄새! 이 열차 내부 풍경!'
무궁화호 열차 특유의 냄새와 풍경이 타임머신처럼 갑자기 옛날로 데려다 놓는다. 저 낡은 문과 선반이 예전 모습 그대로다. 출장으로 종종 타는 ktx, srt와 달리 무궁화호는 정말 오랜만이다. 승객들도 사뭇 다르다. ktx에는 업무나 출장으로 장거리 이동을 하는 승객이 많다면, 무궁화호는 노인분들, 대학생 등 일상생활을 위해 단거리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이 기차를 타길 정말 잘했다. 기대 이상의 이 분위기와 이 풍경 속에 두 시간이나 머물 수 있다니.
가방을 꼭 쥔 채로 꾸벅꾸벅 졸고 계시는 할머니 옆자리에 조심스레 앉아 창밖을 본다. 철로 근처 동네들의 여전한 모습도 정겹고, 도시를 벗어나자 벼들이 일렁이는 초록 들판도 싱그럽다. 몸으로 전해지는 열차 특유의 덜컹거림과 소음도 예전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LP 레코드판을 켰을 때의 지직거림처럼 아날로그가 주는 낭만이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이 시간을 즐긴다.
어느새 기차는 김천, 황간, 영동, 옥천을 지나 대전에 가까워지고 있다. 대전에서 뭘 할지 인터넷 검색창에 물어보아도 마음에 흡족할 만한 답은 없다. 게다가 대전에 가까워지니 여름 한낮 햇살이 따갑다. 그래도 어떻게든 되겠지.
잘 가!
대전역에서 내려 서울행 타임머신은 떠나보낸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대합실로 올라간다. 평소에 열차를 탄 채로 통과하던 대전역은 이렇게 생겼구나. 옛날보다 많이 커졌다. 철로 위에 공중 역사가 커다랗게 만들어져 있다.
일단 관광 안내소로 찾았다. 대합실 한쪽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 들어가니 직원들이 반갑게 맞는다. 다른 지역 안내소와 다른 점이라면 대전을 상징하는 굿즈를 판매한다는 점이다. 대전의 캐릭터가 여전히 대전엑스포 꿈돌이라는 것에 추억 돋는다. 시티투어 리플릿을 살펴보니 시티투어는 대부분 오전에 시작한다. 이미 시간은 오후를 훌쩍 넘어가고 있는 터라 시티투어도 패스.
대합실에 빈자리 하나가 생겨서 앉는다. 그리고 쓰윽 주위를 둘러본다. 신기한 일이다. 대합실을 한번 훑어보았을 뿐인데 갑자기 새로운 여행 아이디어가 두 가지나 생겼다.
대합실에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바로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이다. 오늘 한화와의 원정경기가 있는 날인가 보다. 검색해 보니 심지어 경기장인 한화 이글스파크까지 거리도 멀지 않다. 삼성 라이온즈 원정 응원은 가본 적이 없는데 좋은 기회다.
'어, 괜찮은데?'
대합실 전광판에 곧 출발 예정인 기차들의 목록이 지나간다. 서울, 동대구, 부산... 이런 역이름 건너 청주, 충주를 거쳐 제천까지 가는 충북선 역명들이 보인다. 청주는 군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 당시 주소로 정확하게는 괴산군 증평읍 연탄리 산 00번지(지금은 증평군으로 괴산군에서 분리되었다). 충북선 무궁화호는 증평역에도 정차한다. '아, 그러면 30여 년 전에 군 생활한 부대에 다녀올 수도 있겠다.' 기차 출발 시간도 여유가 있다. 타임머신을 계속 타고 군인 시절로 돌아가기, 이것이 두 번째 선택지다.
두 번째가 좀 더 끌린다. 30여 년 만에 증평에 다시 가볼 수 있다니. 곧바로 코레일 앱에서 돌아오는 열차 시간까지 확인하고 증평행 왕복표를 예매했다. 계획 없이 집을 나섰지만 일단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오니 새로운 여행길이 생겼다.
가만히 집에만 있었더라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계획이다. 뭐든 실행이 필요하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는다면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걷다 보면 인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내어 준다.
충북선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쯤이다. 그렇다면 1시간짜리 투어가 가능하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구도심을 잠깐 돌아볼 수 있겠다. 역의 서편, 그러니까 대전역 광장으로 나서면 오래된 지하상가 구경을 할 수 있다. 역의 동편으로 나서면 서울의 익선동처럼 낡은 구도심에 카페가 생겨나 핫플레이스가 된 대전 소제동이 있다. 소제동이 오늘의 타임머신인 무궁화호랑 분위기도 연결되고 괜찮을 듯하다. 거기에서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해서 충북선에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계획은 급변경되었다. 이유는 풍겨오는 빵 냄새를 따라 길게 늘어선 대기 줄 때문이다. 바로 성심당 대전역점이다. 성심당은 미군에서 원조한 밀가루로 빵을 만들기 시작한 이래, 이른바 ‘튀소(튀김소보로)’로 최근에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었다. 지역에 기여하고자 타 지역에는 출점하지 않고, 오로지 대전에만 매장을 두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전에 오면 꼭 들리는 곳이 성심당이다.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던 시절에 본점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지만, 발길은 저절로 긴 대기 줄 뒤로 이끌렸다. 출출하기도 했고, 가족들에게 사다 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증평에서 대전역으로 다시 돌아올 때는 이미 문 닫을 시간이라 불편해도 구입해서 들고 다닐 요량이었다. 긴 줄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빠진다. 마침내 튀소 두 세트를 받아 들고 나왔다. 시그니처인 튀김소보로와 부추빵 세트, 그리고 바로 먹을 빵 두 개를 낱개로 샀다.
그래도 이미 시간이 20분 이상 흘러가버리는 바람에 소제동 나들이 계획은 접고 카페를 찾아본다. 그런데 부산을 대표하는 삼진어묵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튀김소보로에는 우유나 커피가 잘 어울리지만, 어묵 국물과도 괜찮지 않을까. 새로운 도전 성공! 튀소와 어묵 국물, 의외의 조합이 꽤나 잘 어울린다. 1시간 대전 투어를 대신한 성심당과 삼진어묵의 콜라보도 예상외로 좋았다.
배도 든든하고 마음도 푸근하게 충북선 무궁화호에 몸을 싣는다. 같은 무궁화호이지만 대전 올 때 탔던 것과는 좌석 시트 색도 다르고 분위기 또한 다르다. 대전역을 출발한 기차는 신탄진역을 지나 푸른 들판을 달린다. 달리는 기차 옆으로 장마로 불어난 금강이 같이 달린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열차 내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 열차 잠시 후 조치원, 조치원역에 도착하겠습니다.”
1993년 초여름 새벽의 조치원역.
신병훈련소를 떠난 밤 기차가 이등병 대여섯 명을 내려준 곳이다. 신교대를 갓 퇴소한 이등병들을 태우고 통일호 열차는 창원역에서 출발했다. 중간중간 본인 이름이 불린 병사들은 다음 정차역에 내렸다. 밀양역, 청도역을 지나 동대구역쯤에서 이름이 불리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실패! 하긴 대구 청년이 대구에서 군복무를 한다면 어찌 현역 사병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창밖으로 대구83타워(당시 우방타워)의 불빛이 멀어지고 왜관, 구미, 김천, 대전을 지날 때까지도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제일 많이 내릴 예정이라는 '서울 용산역까지 결국 가나보다'하며 잠을 청했다. 새벽 2시를 훌쩍 지나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내 이름이 불렸다. 다음 정차할 역은 조치원역이었다. 새벽 3시 무렵 조치원역 작은 광장에 몇 명의 신병들은 바깥세상으로 내던져(?) 졌다.
아침 일찍 자대에서 데리러 나올 거니까 대기하라는 안내 말고는 어떠한 통제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신병 관리다. 이등병들이 그 길로 딴 데 가버리면 탈영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말이다. 그래도 신교대 퇴소식 직후라 군기 가득한 우리는 역광장을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군 생활을 하게 될지 모르는 막막함과 긴장감을 안고 광장을 배회하던 이등병들은 DDD 공중전화를 발견했다. 훈련소에서는 감히 꿈도 못 꾸었던 전화 통화가 가능하다. 사이좋게 돌아가며 집으로 전화했다. 곤히 주무시는 전국 곳곳의 부모님들을 깨우는 '단체 불효'를 저질렀다. 그렇게 자유의 새벽 공기를 마시며 푸른 동이 터 올 때까지 기다렸던 그곳이 바로 조치원역이다.
초여름 뿌연 안개가 걷히기 전에 역광장에 인솔할 하사관이 나타났다. 이등병들은 조치원역에서 충북선 비둘기호 열차에 다시 태워져 어딘지 모를 미지의 부대로 향했다. 그 기차 창밖으로 충청도 특유의 나지막한 산과 너른 들이 지나쳐 갔다. 온통 초록의 향기가 아침 안개에 배어 있었다.
*<전역한 군부대 방문기>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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