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겨울밤은 춥고 길었다. 저녁이 되면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지친 여행자들이 호스텔의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서 다음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럴 때면 호스텔 스텝은 우리에게 따뜻한 터키식 커피를 만들어주곤 했다.
어느 날, 나는 배낭여행자의 포스가 가득한 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났다.
코소보에서 온 그녀는 베오그라드에 하루 있다가 곧 서유럽 쪽으로 넘어갈 예정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들을 들려주었다. 저녁을 먹고 할 일이 딱히 없었던 나와 다른 여행자는 흙탕물처럼 진한 터키 커피를 마시면서 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그러던 중, 내가 베오그라드에만 열흘간 머무른다는 것을 알게 된 그녀가 문득 한국어로 나에게 단언하듯 말했다.
베오그라드는 그렇게 오래 있을만한 도시는 아니에요. 모처럼 여행 왔는데, 다른 데도 가보고 해요.
마치 날씨 좋은 날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는 어린 아이를 보는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내가 국립박물관에 갔었고 내일은 또 다른 박물관에 갈 것이다, 라고 변명하듯 줄줄 늘어놓았지만 그녀가 보는 내 이미지는 바뀌지 않았다.
‘수 천 킬로미터를 날아와서 겨우 한 도시에만 머물러 있는다고? 이런 딱한 화상을 보았나.’
내 여행법을 안타까워하던 그 여행자는 다음 날 또 다른 도시를 찾아서 떠났다. 그리고 방랑자스러운 모습이 어딘가 멋져 보이는 그녀에게 감화를 받은 나는 다음 날 계획했던 것을 포기하고 다른 여행자와 인근 도시에 다녀왔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애초에 여러 도시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최대한 많은 장소에 가고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보기 위해서 여행을 할 때 끊임없이 이동한다. 블로그나 sns에서 봤던 유명한 포토 스팟에서 인증샷도 찍고, 꼭 가야하는 가게에도 들러서 기념품을 사거나 음식을 사 먹는다. 나는 몇 번 여행을 해보고 난 뒤에, 이런 여행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익숙한 것들에 둘러싸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나는 수천, 수만킬로미터를 날아가서 그 곳의 박물관에서 하루를 보낸다.
베오그라드에서 나는 아침마다 붐비는 카페에서 직장인들 틈에 끼어서 짭짤한 치즈 페스트리와 커피로 요기를 한 뒤 매일 다른 박물관으로 출근했다. 국립박물관에 가서 당시 그 지역에서 화제가 되고 있던 인종문제에 대한 전시를 보기도 하고 미술 전시를 보기도 한다. 이따금씩은 세르비아 출신의 발명가 테슬라에 대한 콘텐츠를 담고 있는 박물관에 놀러가기도 한다. 비수기라 관람객보다 직원 수가 더 많은 전시실 안에서 그 곳의 직원들과 수다를 떨면서 신기한 과학 전시물들을 즐겁게 체험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면 열흘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오래 전에 한동안 파리에 가 있었을 때에는 에펠탑 한 번 올라가보지 않고 매일매일 박물관에만 줄기차게 놀러 다닌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피한 것은 아니고 박물관 덕질에 빠져서 정신없이 다니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에펠탑을 깜빡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박물관을 가느라고 바빠서 근처에 있는 개선문에서 사진 찍는 것도 깜빡했다.
러시아에서는 미술관에 푹 빠져서 돌아다니다보니, 여행이 끝난 뒤 그 곳을 떠올리면 상징적인 관광지나 아름다운 거리보다 거의 매일 방문했던 러시아 미술관의 한 전시공간에 걸린 커다란 작품과 그 앞에 놓인 의자가 생각난다. 런던을 떠올리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냈던 셜록 홈즈 박물관의 도슨트 얼굴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난다. 박물관 투어 여행의 단점이라고 하면 정작 방문한 도시의 풍경보다 실내, 그러니까 박물관 내부가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휴가에서까지 박물관 덕질에 심취하다보니, 나는 함께 여행을 간 동행인들에게 민폐일 때가 많다.
오사카성 역사 박물관에서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전시를 보느라 시간을 보낸 탓에 함께 간 사람들이 배를 곯게 했다. 방콕에서는 짐 톰슨 박물관 투어 중에는 다리 아픈 친구를 옆에 세워놓고 도슨트에게 유물에 대해서 한참을 질문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나와 비슷한 취미의 동행인을 만나도 민폐는 여전해서, 예전에 고고학 덕후인 외국인 친구에게 경주의 국립박물관을 안내했을 때는 두 덕후가 의기투합한 덕에 박물관 폐관할 때까지 서로 보고 싶은 유물을 보느라 이번에는 직원들을 피곤하게 하고 말았다.
그렇다보니 박물관 투어를 위한 여행을 할 때면 되도록 혼자서 가곤 한다.
나만의 페이스로 꼼꼼하게 유물이나 작품을 보고, 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본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되돌아가서 보기도 한다. 앉아서 쉬고 싶으면 의자에 앉거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봤던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