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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Jun 30. 2022

 큐레이터의 슬기로운 휴가법 (2)

재미없어서 책에는 담지 않았습니다만

(이전 글에서 이어집니다)




스키 선수 출신인 내 친구 한 명은 겨울 스포츠를 하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


하루 종일 다른 나라의 스키장에서 하루를 보낸 뒤에 밤에는 맥주 한 잔을 하는 지극히 모범적인 스키광의 여행을 실천한다. 내가 매일매일 박물관 탐방을 하는 것처럼, 그도 마치 회사원처럼 스키장으로 출근을 하고 저녁에는 지쳐서 맥주 한 잔 하고 바로 잠들어버리는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친구를 보면서는 ‘멋지게 산다’라고 엄지를 치켜 올리면서, 내가 휴가 때 그 멀리까지 가서 박물관만 다녔다고 하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출장갔니?’하고 묻는다.


박물관은 왜 이렇게 지루함의 상징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지겨워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박물관이 제일 재미있는 곳이다.


루브르 같은 유명한 곳이 아니더라도 각 지역의 박물관을 방문하고 그곳의 전시를 보는 것은 생각 만해도 가슴 뛰는 일이다. 사람들이 유명한 관광지에서 일상과 다른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는 것처럼, 나는 박물관에서 신기한 것, 새로운 것을 찾고 기쁨을 느낀다.


어떻게 보면 박물관은 한 나라, 한 도시의 정수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시하는 방식을 통해서 역사를 어떻게 보는지를 알 수 있고, 어떤 예술 작품을 어떻게 보여 주냐를 통해 현재 그 지역에서 ‘핫한’ 스타일이 뭔지를 알 수도 있다. 또 여러 주제의 단편 소설이 수록된 책을 휘휘 넘기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게 되는 것처럼, 박물관 안에서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흥미로운 유물이나 전에는 알지 못했던 작가의 작품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고흐, 마네, 드가 등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들로 유명한 오르세 미술관에서 뜬금없이 아카데미 화가 부게로의 작품을 재발견하고 푹 빠진 적이 있다.


인상파 작품으로 잘 알려진 오르세 미술관에서,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반대했던 ‘살롱전’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주류인 아카데미 미술의 대표작가에게 매료되었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는 인상파에 밀려 저평가되었던 아카데미 화가 윌리엄 부게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시 평가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전시는 그런 새로운 추세를 반영한다. 아마도 내가 부게로를 재발견한 것도 전시에 반영된 새로운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박물관의 전시는 그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추세를 반영하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가장 시대에 뒤쳐져 있을 것 같은 박물관에서 오히려 최신 유행을 배우는 때도 많다.


나는 고전적인 예술작품을 보러간 러시아이지만, 정작 그곳에서는 소비에트 미술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수년 전에는 뉴욕의 미술관에서 패션을 예술로써 바라보는 전시를 열어서 큰 반향을 끼치기도 했다. 최근에 한국에서도 많이 생겨나고 있는 개방형 수장고를, 나는 오래전 케-브랑리라고 흔히 부르는 프랑스의 인류학 박물관에서 만나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박물관 덕질은 가끔씩 생각지도 못했던 최신 유행을 접하게도 해준다.


박물관은 도시에 대해서 알려주기도 한다.


블라디보스톡의 아르셰니예프 역사 박물관에서는 당시 미국 여성 엘레노어 프레이에 관한 전시가 열렸다. 20세기 초 격동의 시기 이 곳에서 살았던 그는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30년이 넘게 블라디보스톡에 살면서 수많은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가 최근에 다시 발견되어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전시는 그의 편지에 묘사된 블라디보스톡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를 보고나면 아무 생각없이 마주쳤던 도시의 풍경들이 마치 숨은 역사들로 가득찬 보물처럼 보인다.


내가 소도시에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시골에 있는 작고 알려지지 않은 박물관도 좋아한다.


중앙아시아의 쇠락한 한 소도시에서 만났던 박물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소련 시절 레닌으로부터 치하를 듣기도 했던 이 소도시에서는 지금도 그때의 영광을 보여주는 유물들과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낡고 먼지가 쌓여가는 민속 전시품 사이에, 지금은 쇠락해버린 이 도시를 바라보며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 한 노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아 천천히 낡아가는 이 박물관에서, 이름없는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으니 어쩐지 쇠락해가는 도시에 대한 연민이 일어난다. 나는 그 도시를 떠올릴 때면 사막의 모래 섞인 바람이나 저 멀리 지나가는 낙타가 아닌, 그림 속 노인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월든 호숫가에 은둔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잔지바르에서 고양이나 세기 위해 세계 여행을 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집에서 자신의 내면을 탐험하라고 했다.


나는 잔지바르에서 고양이를 세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물관을 세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


그리고 소로우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박물관을 만나는 여행을 하면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낯선 곳의 박물관에서 동종 업계 사람들이 했던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며 내 일을 생각하게 된다.







러시아의 어느 박물관을 갔을 때였다.


전시를 마치고 나오는데 벽 한 켠에 작은 테이블과 종이 따위가 놓여진 것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본 나는 저도 모르게 킥킥 웃고 말았다.


나는 전시를 할 때 전시와 관련된 컬러링페이퍼나 퍼즐 같은 체험 활동을 꼭 만들어 놓곤 했는데, 바로 그런 전시 연계 활동지가 놓여있었던 것이다. 


낯선 나라에서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한 활동지를 보게 되다니 반가우면서도, 내가 그랬듯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도 관람객이 재미를 느끼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었는지가 여실히 느껴져서 웃음이 나왔다.


휴가 와서 박물관 덕질을 하는 나를 보면서 사람들이 하는 ‘출장 왔니’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사람은 각자 취미가 있는데, 보기에 지루해 보인다고 ‘출장’이라고 낮춰보다니!


하지만, 정작 나는 휴가 때 박물관에 가면 자연스레 펜과 수첩을 꺼내서 그 곳의 전시 스타일에 대해서 메모하고 나도 시도해야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사진으로 찍고 있다.


어쩌면 사람들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천,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간 휴가지에서 결국 업무를 하고 있었다.




남애리, 《소소하게, 큐레이터》, 문학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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