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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Nov 14. 2015

아랄해, 사라지는 바다를 그리워하다

2년, 카자흐스탄의 일상

기차는 새벽 5시 경에 아랄스크 역에 도착했다. 


아랄스크 역은 아직 한밤중이었다. 시각은 새벽이었지만 동이 트기 직전 칠흑같은 어둠이 주위에 고요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일행과 함께 희미한 전등 켜진 역사 대합실에 앉아서 아침을 먹었다. 조용한 건물 안에 음식 씹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려퍼졌다. 


대합실 한쪽 벽면에는 햇볕에 타 갈색 피부를 한 어부들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어부들은 그물을 털고 잡아온 고기를 리어카 가득 실어 나르고 있다. 그 옆에서는 공산당 당원 복장을 한 남자가 자랑스런 표정으로 종이 한 장을 두 손에 든 채 글을 읽어주고 있다. 레닌이 친히 보내온 편지라고 적혀 있다. 풍부한 생선을 잡아다줘서 그 기여에 감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예전에는 아랄스크 역 근처에 부두가 있었다고 한다. 바다내음과 철썩이는 파도소리, 그리고 뱃고동 소리가 역에까지 울려 퍼졌으리라. 어부들이 하선하면 머리에 흰 수건을 쓴 아낙들이 달려와서 팔딱거리는 갓 잡은 청어를 나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선한 생선들은 곧바로 기차에 실어져 기적소리를 울리며 각 도시로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역 근처에서는 바다냄새 조차 나지 않는다. 바다는 오래 전 말라버려 멀리 내륙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볼 수 없다. 


하늘이 청아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역 바깥으로 나갔다. 푸른 어둠 속에 잠긴 쇠락한 작은 소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이 꺼지기 시작했고, 저 멀리서 새벽녘 잠에서 깨어난 집들의 불빛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조그마한 역 광장 건너편에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배 모양의 조형물이, 이곳이 과거 항구도시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점점 줄어드는 아랄해를 보기 위해서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낡은 택시를 타고 한참을 달려 잘라나쉬라는 마을까지 가야 한다. 


가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카자흐스탄의 지방도로들이 다들 그렇듯, 도시를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 풍화와 침식 작용으로 여기저기 푹 꺼진 도로가 나타났다. 택시기사는 거의 카레이싱을 하듯 고속으로 자동차를 몰면서, 이런 푹 꺼진 부분이 나타날 때마다 속도도 줄이지 않은 채 핸들을 꺾어 피했다. 그럴 때마다 차 안은 요란하게 요동치다가 이내 다시 돌 튀기는 소리와 타이어 마모음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가는 길에 도로 옆에는 마치 유령도시와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거의 폐허가 되어가는 음산한 공장단지들과 아파트, 철골이 들어난 돔 따위가 끝없이 이어진다. 반쯤 모래에 파묻힌 공장의 지붕은 언젠가부터 날아가고 없었고, 벽면 역시 철근 골조를 드러내며 시뻘겋게 부식되어가고 있었다. 전봇대의 전기선도 반쯤은 끊어지고 땅 위로 드러난 도시배관도 군데군데 끊겨있는, 아무도 살지 않는 아파트 단지에는 칠이 벗겨진 벽 아래에 쓰레기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저건 옛날 마을이예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저게 대체 뭐냐고 묻는 나에게, 택시기사가 아무렇지 않은 듯 러시아어로 대답했다. 


“지금은 다 떠나고 아무도 없어요.” 






잘라나쉬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 경이었다. 황무지 가운데 덩그러니 위치한 쇠락한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군데군데 낙타를 가둔 울타리가 있었는데, 사람이 가까이 가면 낙타는 기차 경적 같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마치 비웃듯이 한쪽 입술을 치켜 올리며 푸후거리곤 했다. 


이제는 그 마을에서도 사륜구동차로 한참을 달려가야 아랄해를 볼 수 있다. 바다가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로 가는 길, 나는 거대한 폐선들이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광경을 보았다. 거대한 녹슨 배들은 마치 길을 잃은 듯 메마른 사막 위에서 서서히 모래에 침식되어 가고 있었다. 하얀 모래로 덮인 주변의 땅에는 신비로운 연보랏빛 이끼들이 바닥에서 숨죽이며 자라나 있었고, 그 옆에는 배에서 떨어져나온 부품인 듯 녹슨 쇳조각들이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다. 


바다가 가까워지자, 모래의 빛깔이 흰 색에서 노란색으로, 누런 빛에서 다시 은빛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이따금씩 나타나는 쩍쩍 갈라진 건조한 땅바닥에는 조개껍데기와 함께 야생동물의 해골이 처량하게 뒹굴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 옆에는 소금기를 머금은 옅은 보랏빛 풀들이 가늘게 자라나 있다. 


사륜구동차가 40분 가량 달렸을 때, 바다내음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갈대와 진흙뻘이 보였다. 찰랑거리는 투명한 물도 보였다. 아랄해다. 


바다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호수보다 더 잔잔한 물이다. 나는 저 멀리 보이는 잔잔한 수평선을 보며, 칭기즈 아이뜨마토프의 『백 년 보다 긴 하루』 라는 소설과 기차역에서 보았던 벽화를 떠올렸다. 한때는 이 얕은 물에도 거대한 고깃배들이 돛을 단 채 위풍당당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어부들은 만선의 꿈에 부풀어 바다로 나갔을 것이고 항구에서는 아낙들이 청어를 절이며 남편을 기다렸을 것이다. 


지금도 점점 줄어들어서, 언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이 초라한 바다를 보면서, 여행객인 나는 감상적인 향수에 젖어들었다. 


문득, 아랄스크 지역사 박물관에서 보았던 한 그림이 생각났다. 나무 주택을 개조해서 만들었을 법한 먼지 쌓인 박물관 안에는 지금은 누구도 쓰지 않을 어구들과 박제, 항구의 풍경을 담은 옛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구석에는 그림이 한 점 걸려 있었는데, 그림 한가운데에는 참전용사였던 한 카자흐인 노인이 힘없이 앉아있다. 뒤에는 ‘어머니 조국’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제2차 세계 대전 모병 포스터가 붙어있는 아랄스크 역과 붉은 깃발이 휘날리는 의사당 건물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다. 


노인이 밟고 있는 땅은 말라붙은 채 쩍쩍 갈라져가는 아랄 해였다. 소련 정부로 받은 훈장을 가슴 가득 달고 있는 그 노인의 모습은 너무도 무기력해서 서글프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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