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을 위한 런던의 하룻밤 1
2012년 겨울.
나는 거진 한 달간 파리 여행을 계획하고 파리에 왔다. 유명하다던 몽 생 미셸도 가지 않았고, 니스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그저 파리, 정확히 말하자면 일드 프랑스 지역에 한 달간 머물러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나는 한국에 관광을 와서 경주도 안가고, 부산도 안가고, 그냥 경기도 밖으로 안나갔던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프랑스어를 잘 못한다. 내 프랑스어는 태생적인 길치 유전자를 보완해서 길을 물어보고 여행할 정도까지만 되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한 달 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도시에, 그것도 자신이 형편없이 구사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꽤 외롭다. 대화할 사람이라고는 친절하게 영어로 말을 걸어오며 내 호주머니의 스마트폰으로 손을 뻗는 집시들과, 그게 아니라면 공원이나 카페에서 만나서 몇 마디 주고받고는 결국 말이 안통해서 침묵만 남게 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뿐이다.
하던 일까지 그만두고 왔던 여행이었다. 나는 비행기를 오래 타면 후유증이 좀 길게 남는터라, 다시는 유럽에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프랑스의 바로 옆에 있는 영국도 한 번 다녀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덜컥 기차표를 예매했다. 파리(정확히 말하면 파리 인근의 한 주거지역)에 방을 거진 3주간 빌려놓았기도 하고 런던에는 별로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그냥 하룻밤만 자고 오기로 결심했다.
그렇다. 남들이 며칠씩도 머물러서 관광을 한다는 런던에, 나는 단 하룻밤만 보내고 오기로 한 것이다.
내가 런던에 가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셜록 홈즈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 <셜록>도 엄청나게 좋아하지만, 사실 내가 생각하는 셜록 홈즈는 이마가 넓다고 할 정도까지만 머리가 벗겨졌고, 담배를 슬리퍼에 숨기는 걸 좋아하며, 의사 친구 앞에서 대놓고 마약을 하는(물론 빅토리아 시대에는 현재의 '마약'이 공공연하게 사용되거나 심지어 처방되는 경우도 있었다고는 한다) 키크고 마른 탐정이다. 바로 베이커 스트리트 221B에 살았던 , 인류사에 길이 남을 탐정 셜록 홈즈 말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인류사에서 전무후무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홈즈가 최초의 근대적인 탐정이라거나(사실 그 보다 앞서 오귀스트 뒤팽이 있고, 무엇보다 홈즈는 '자문형' 탐정이라 일반 탐정과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프로파일러라거나, 셜록 홈즈로 인해서 근대적 수사기법이 경찰에 도입되었다는(정확한 사실은 아니다) 등의 이유가 아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그 소설이 독자에 의해서 현실과 섞여 버렸고 그렇게 섞여 버린 현실이 일종의 역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아서 코난 도일이 쓴 불성실한 사건기록 속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을 집어내고 합리적인 설명을 찾아내고 있으며, 소설 속에서 설명하지 못한 공백을 채우고, 빅토리아 시대의 이 위대한 탐정의 정확한 연대기를 만들어낸다. 빅토리아 시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셜록 홈즈는 실존인물처럼 주소를 가지고 있고 20세기 들어서 그 주소가 실제로 생기자(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소로 편지를 보낸다. 아마 그렇게 전세계에서 편지를 받아보는 허구의 인물은 셜록 홈즈와 산타클로스가 유일할 것 같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보냈던 셜로키언(Sherlockian)의 성지 런던 베이커 가 221B였다.
사실 런던 여행을, 그것도 단 1박 2일로만 가는 나의 동기를 솔직히 말하기는, 참으로 낯뜨겁고 창피하다. 특히, 출입국심사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아다시피 파리에서는 기차로 런던을 갈 수 있다. 북역(Gare du Nord)에서 한국 KTX와 알림음마저 완전히 동일한 고속기차를 타고 약 2시간 정도면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역에 도착할 수 있다. 출입국심사는 파리 북역에서 유로스타를 타기 전에 하는데, 나는 셜록 홈즈를 찾으러 가는 여행에 너무 들떠 있어서 불만이 가득차 있는 영국인 출입국심사원에게 이 얘기를 거의 할 뻔했다.
출입국심사대에서 내 앞에 줄이 길게 두 줄이 있었는데, 심사대는 세 군데였다. 한 군데는 어딘가 심술이 얼굴에 가득 붙어있는 영국인 중년 여인이 앉아있었는데, 프랑스인들은 마치 그녀를 피해서 양쪽에만 줄을 서 있었다. 양쪽에는 기분은 괜찮아보이지만 무뚝뚝해보이는 입국심사원 두 명이 기계적인 음성으로 방문목적을 묻고 스탬프를 찍어주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인들이 가운데를 비워놓고 양쪽 심사대에 줄을 서 있는 걸 비웃으며, 당당하게 그 불만에 가득찬 영국인이 앉아있는 출입국심사대로 갔다. 사실 나는 셜록 홈즈 때문에 지나치게 들떠 있어서 아무생각이 없었다.
"영국에 왜 오는 거지?"
진짜 질문이 딱 저랬다. 마치 '너는 왜 런던타워에 폭탄테러를 한 거지?'하는 말투로.
프랑스인들이 저 사람을 피했던 이유가 있었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성질내면서 '너 나가' 할 것 같든 표정이다. 들떠 있던 나는 명랑하게 "셜록 홈즈 때문에요!"라고 말을 꺼내다가 "Sher...."하고 그녀의 표정을 보고 굳어버렸다. 그리고 "관광때문에....요?"라고 대답했다. 마치 퀴즈쇼에서 망설이며 정답을 내놓을 때처럼.
그런뒤에 그녀는 뒤이어 질문들을 퍼부었는데, 나는 거기에 최대한 성심성의껏, 그리고 최대한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영국에 얼마나 있을건데?
- 내일 다시 돌아올건데요.
영국에 아는 사람 만나러 가는거니?
- 아뇨,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요.
영국에서 어느 도시에 갈건데?
- 런던에만 있을건데요. 베이커 가 221B에 갈거예요! (물론 덕후의 들뜬 미소를섞어서)
어디서 잘건데?
- 아직 모르겠는데요.
잘데를 안 정해놓고 여행을 가면 어떡해!
-그러게요. 그냥 마음가는대로 여행하는 중이라서요.
숙소 없으면 어떻게 할래?
-진짜요? 숙소 없을수도 있나요? 지금 비수기아닌가요?
사실 내가 베이커 가 221B를 언급한 것은 누구한테든 자랑을 하지않으면 들뜬 마음을 못 참을 것 같아서였다. 물론 '나는 셜록 홈즈네 하숙집을 보러 간다구!!!!'하는 기쁜 표정도 함께. 그런데 베이커 가 221B 이야기를 하는 순간, 짜증을 가득 머금고 있던 그녀의 입술에 살짝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잘데가 없다는 게 말이 되냐며 한참을 잔소리를 하더니, 그녀의 말 때문에 갑자기 숙소 문제가 걱정되어 불안해하기 시작하는 나에게 숙소 상담을 해주며 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거기서 숙소를 찾을 수있을거라고 걱정하지말라고 오히려 안심을 시켜주었다.
"숙소 찾을 수있을거야. 걱정하지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제야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여권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내 뒤에는 다시 안심한 프랑스인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좋은 여행 되길"
진짜다. 이 아줌마가 진짜로 나한테 그렇게 말했다. 세상의 온갖 증오와 심술과 불친절을 온몸에 담고 있던 이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였다면 절대로 이런 말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덕후의 해맑음은 전염되는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