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을 위한 런던의 하룻밤 2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한인 호스텔에 숙소를 잡았다.
내가 묵은 호스텔은 현관인 낡은 나무문을 지나 길고 좁은 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각각 부엌과 방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장기투숙객이 분명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어둡고 좁은 방 2층 침대에서 튀어나오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1. 여긴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오는 장물아비 '페이긴'의 집이 분명하다. 2. 다음에 숙소를 찾을 때는 가격보다는 질을 따지는데에 신중하자. 어쨌건 셜록 홈즈에 빙의되어 런던으로 왔기 때문인지, 나는 모든 것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찾고있다.
그건 그렇고, 내가 길치라고 이야기를 했던가? 파리에서 늘 길을 잃기 일쑤였던 나는 런던에서도 마찬가지로 호스텔에서 지하철을 찾아가는 여정 시작부터 길을 잃기 시작했다. 차이가 있다면 파리에서는 푸푸거리는 형편없는 프랑스어로 길을 물어봐야 했기 때문에 좀 긴장을 하고 있었다면, 런던에서는 12년간의 주입식 교육으로 영어를 배운 덕분에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에 오니 지나치게(12년 배웠다 이거지) 긴장이 풀려버렸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처음부터 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게다가 들끓는 충동질도 여정이 늦어지는데에 일조했다.
베이커 스트리트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하다가, 중간에 왠지 피카딜리에 가보면 좋을 것 같아서 두어번 갈아타고 피카딜리로 가서는, 이번에는 어쩐지 뮤지컬이 보고 싶어졌다. 가스통 르루의 원작이자 런던에서 초연되었던 <오페라의 유령>을 추리소설 팬으로서 안 볼순 없지, 라는 엉뚱한 생각으로 표까지 예매해놓고, 런던에 왔으니 피쉬앤칩스를 안먹을 순 없지, 하는 또 엉뚱한 생각으로 식당에 들어가서 꾸역꾸역 먹어치운뒤에야, 나는 베이커가로 가기 위해 다시 지하철 역을 찾기 시작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을 위해서 이야기해놓자면, 이번에도 길을 잃었다)
런던의 겨울 날씨는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흐리고 음울하며, 습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날씨. 이런 날씨니 우리의 홈즈 씨도 추리할 거리가 사라지면 우울해서 마약이나 하고 앉아있었지.
하지만, 이런 날씨를 만회하기라도 할듯 런던 사람들은 정말로 친절하다. 내가 런던에 있을 당시 비가 오가고 있는 바람부는 날씨였는데, 바람에 우산이 뒤집힐 때마다 '에구, 어쩌니.'하고 공감을 표현해주는가 하면, 내가 칠칠지 못하게 흘리고 다닌 물건을 주워준다고 10m가량을 나를 부르며 따라온 분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가 핸드폰을 보고 있는 순간 길을 잃을 줄 알고 '불쌍한 것, 길을 잃은거냐?'하고 도와주려고 오기도 했다. (물론 나는 항상 길을 잃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순간은 정말로 핸드폰을 보려고 멈춰선 것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지하철역을 겨우 찾아서 지하철을 타고, '베이커 스트리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쿵덕쿵덕 가슴을 뛰게하는 그 역에 내렸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사냥모자와 굽어진 파이프를 문 유명한 홈즈의 실루엣이 지하철 벽면에 그려져 있다. 타일에도 작은 실루엣들이 잔뜩 그려져 있어서 참으로 재미있는 인테리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꺄아'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저 미친 사람 보게' 하고 옆에서 쳐다볼 줄 알았는데, 현지인들은 이런 광경을 많이 보는듯 했다. 런던의 회사원들이 기뻐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그냥 피식 웃고 지나간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면서, 베이커 스트리트 221B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역 밖으로 나가자, 덕후의 심장을 사로잡는 또 하나의 장치가 떡하니 서 있다. 바로 셜록 홈즈의 동상이다. 손에는 유명한 파이프를 들고 머리에는 사냥모자를 쓴 셜록 홈즈. 이렇게 깨알같이 감동을 줘도 되는 거야, 하는 생각과 함께 이러다간 셜록 홈즈 박물관에 도착하면 심장마비라도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다들 알고 있지만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가 저런 차림을 한 걸 묘사한 적은 없다. 셜록 홈즈가 가장 많이 하는 차림은 아마도 실크햇에 말쑥한 신사의 차림이거나, 집에 처박혀서 마약을 하거나 바이올린으로 왓슨을 괴롭히는 동안 입고 있을 실내복일 것이다. 사냥모자의 셜록 홈즈가 모두 삽화가 시드니 파젯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셜록 홈즈를 기리기 위해서 사냥모자와 파이프 담배에 열광한다.
실크햇의 셜록 홈즈가 아니라 사냥모자를 쓴 셜록 홈즈의 동상을 보고서 좋아서 날뛰고 있는데, 짙은 색깔 유니폼을 입은 덩치 큰 남자 두 명이 슥 다가온다. 사실 런던은 셜록 홈즈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잭 더 리퍼의 고향이기도 하지 않은가. 나는 순간 깜짝 놀랐는데,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걸 보니 경찰 아니면 역무원인 듯 했다. (나중에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경찰의 유니폼이었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베이커 가 221B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나는 그들이 어쨌거나 공무원같으니까 안심하고 물었다.
"오호! 너도 셜록 홈즈 박물관에 가는구나. 일본 사람이니?"
둘 중에 흑인 남자가 물었다. 덩치크고 우락부락 외모와는 달리,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순진한 아이처럼 웃으면서.
그의 말에 따르면 일본인들 가운데 셜록 홈즈 광팬이 많아서, 여기를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는 가는 방법을 알려주고는, 셜록 홈즈의 사건 해결에는 런던 경찰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래, 셜록 홈즈가 스코틀랜드야드에 대해 확실히 자주 언급하긴 했지. 물론 좋은 얘긴 아니었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잘 안다고 이야기했지만, 내 생각에 한권도 읽어본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지하철 역 앞에 서서 경찰 아저씨들이 아닌 경찰 조카들과 잠깐 셜록 홈즈 이야기를 하다가, 길치인 나는 나는 당연히 그가 일러준 방향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까 이쪽으로 가랬나요? 아, 저쪽이었나?"
내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 당연히 장난이었겠지만 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서 '우아악!'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내가 놀라는 걸 보면서 둘이서 깔깔거리며 재미있다고 웃어댄다. 자신이 얼마나 덩치가 커서 위협적으로 보이는지 몰라서 저러는게 분명했다. 하지만 결국 나도 기가 차기도 하고, 내가 소리 질렀던 것이 부끄럽기도 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런던 관광청에서는 비밀 캠페인이라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시민 여러분, 런던의 음습한 날씨에 관광객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시민이 나서서 돌봐줍시다!' 심지어 런던 경찰 내부에도 런던 관광청과의 협조를 통해서 관광객을 즐겁게 해주는 이벤트전문 태스크포스가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순찰도는 경찰 여러분, 베이커 스트리트 역 앞에 죽치고 서 있다가 추리팬들이 오면 이빨로 무는 시늉을 해서 깜짝 놀라는 경험을 선사합시다' 이런 캠페인을 하면서 말이다.
어쨌거나 좀 우락부락하긴 했지만 귀여우신 경찰 아저씨 조카 덕에 한바탕 즐겁게 웃고는, 나는 대망의 베이커 가 221B로 달려갈 수있었다. 셜록 홈즈 박물관 기념품샵과 아까 피쉬앤칩스를 먹었던 걸 후회하게 만드는 허드슨 부인의 레스토랑과 함께 유명한 셜록 홈즈의 하숙집이 보였다.
221B라고 주소가 적힌 문 앞에 누가 서 있다. 경찰은 경찰인데, 다만 이번엔 빅토리아 시대의 순경이다.
문 앞에 서 있는 순경은 그의 말에 따르면 '여기는 셜록 홈즈 씨의 집이라서 지키고 있다'고 한다. 레스트레이드나 그렉슨은 둘다 경감이니 당연히 아닐테고, 그는 어쩌면 존 랜스(주홍색연구에 나오는 순경이름) 일지도 모르겠다. 하도 궁금해서 문 앞에 서 있는 순경에게 물어봤더니, 그는 자기 이름은 중요치 않고 '그냥 셜록 홈즈의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애초에 셜록 홈즈는 사립 탐정이 아닌가! 심각한 범죄 위협이 있지 않고선 순경이 일반 시민의 집 앞을 지킬 일이 없을텐데, 애초에 이 순경은 왜 서 있는 거지?
어쨌거나,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재까지 런던의 경찰들은 전통적으로 탐정 홈즈 씨의 연대기를 전혀 읽지 않는것으로써 스코틀랜드 야드에 대한 홈즈의 악평을 보이콧 하려는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나는 셜록 홈즈의 하숙집 베이커 가 221B 문을 열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