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이 산수화를 그린 이유
전통적으로 산수화는 서양의 풍경화와는 달리 실재하는 자연의 특정한 양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와 도덕을 담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특히 북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에서 발전해온 서양의 풍경화는 실재하는 공간을 2차원 평면에 재현한다. 많은 풍경화는 평면의 그림 속에 입체적인 풍경들을 담아내려고 했으며, 이를 통해서 실재의 풍경을 재현하려고 했다. 산수화는 풍경화와는 맥락이 조금 다르다.
산수화는 상징이며 관념이다. 그림 속의 산수(山水)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을 표상하며, 이러한 자연은 우주의 질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북아시아 문화권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자연 속에서 도(道)로 일컬어지는 일종의 질서를 발견하고자 했고, 자연 속에서 도를 실천하려고 애썼다. 산수화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이며, 도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 챕터의 인용문은 이종묵 편역, 『누워서 노니는 산수(조선시대 산수유기 걸작선)』에서 가져왔습니다.
조선의 옛 선비들은 산수를 유람하는 것을 즐겼다. 봄이면 꽃을 보러 강에 배를 띄웠고, 가을이면 단풍을 보기 위해 유람을 다녔다. 물론 여기에는 기생도 빠지지 않는다. 기생과 악사를 데리고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빼어난 경치를 즐기면서 선비들을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 물론 풍류만 즐긴 것은 아니다. 옛 선비들은 산세가 뛰어난 산이나 폭포수를 감상하러 기꺼이 유람을 떠나기도 했다.
선조 36년(1603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온 이정구라는 선비는 산수벽이 도지고 말았다. 예조에서 일을 하면서 지루해죽을 지경이던 이정구는 친구였던 승려 성민의 편지를 받고 옳다구나 얼른 유람을 떠난다. 유람 중에 산길이 험하다는 동행의 말에 이정구는 ‘늙으면 못 갈 것’이라고 대꾸하며 길을 떠난다.
나는 그때 멀리 금강산을 아득히 생각하고 표연히 바람을 타고 오디론가 떠날 마음이 들던 중이었다. 이 편지를 받고 나니 마음을 자제할 수 없었다. 곧바로 행장을 갖추고 떠날 차비를 하였다.
…(중략)…
“우리들이 이미 백발이 되었소. 이번 길도 또한 우연히 이루어 진 것이라오. 이번에 봉우리 하나 올라가 보지 못한다면 훗날 반드시 가볼 수 있다고 기약할 수 있겠소?”
등산에 대한 사랑은 예순일곱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관악산 연주대를 올랐던 체재공(1720-1799)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엉금엉금 기어서 기어이 산을 오른다.
승려들이 나에게 말하였다.
“연주대는 여기서 10리 쯤 됩니다. 길이 매우 험하여 나무꾼이나 중들도 또한 쉽게 넘어갈 수 없습니다. 기력이 미치지 못하실까 걱정됩니다”
내가 말하였다.
“천하 만사는 마음에 달렸을 뿐이라. 마음은 장수요, 기운은 졸개다. 그 장수가 가는데 그 졸개가 어찌 가지 않겠는가?”
그렇게 산에 올라서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체재공은 도봉산 화룡폭포를 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사색한다.
물의본성은 그저 아래로 흘러갈 뿐이다. 비어 있으면서도 차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 순리를 좇기 때문에 흐르지 못하게 하여도 흘러가는 것, 이것이 바로 물의 상도다. …(중략)…내 보니, 오늘날의 사람들 중에서 하늘에서 보여받은 것을 보존할 수 없는 이가 많다. 폭포여, 폭포여. 내가 너에게 무엇을 탓하랴.
등산을 하면서, 산을 뛰어난 철학자에 비교하기도 한다. 박종(1735-1793)이라는 선비는 퇴계 이황이 무척이나 좋아했던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 길 높게 솟은 절벽을 올려다보면 굽힐 수 없고 범할 수 없는 선생의 뜻과 절개를 볼 수 있고, 외로운 구름과 절벽에 머물고 밝은 노을이 골짜기에 깃드는 곳에서는 깨끗하고 그윽한 선생의 흥취가 남아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 아마도 경치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정조 임금 당시의 홍양호(1724~1802)라는 선비는 북한산 아래에 집을 지어놓고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나에게 이 집은 한 달에 한 번 들를 정도에 지나지 않고 집 앞의 개울 또한 매일 한두번 올 뿐이지만, 그 즐거움이 이른바 날마다 달마다 이르는 것이라 하겠다. 만약 내가 벼슬에서 물러나 이 곳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오랫동안 살아 수양이 깊어지고 습성이 편안해져 참된 것을 깨닫게만 된다면, 그 즐거움이 여기서 온전해 질 것이요, 안연의 즐거움에 나아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경치가 산과 물을 유람하는 즐거움은 선비들 공통의 취미였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했던 그들은 경치가 빼어난 곳에 집을 짓고 살기도 했지만, 산세가 빼어난 산이나 경치가 좋은 물 근처에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경우나, 나이가 들어서 유람을 하기가 힘든 경우에는 어떻게 했을까. 바로 여기서 그림이라는 매체가 등장한다.
최초의 산수화론이라고 할 수 있는 종병(宗炳)의 『화산수서畵山水序』에서는 과거 유람했던 명산을 그려 감상하는 것은 단순히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산수를 통해서 마음 속에 일었던 고양된 정신의 감흥을 다시 체험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방 안에 누워서 자연을 노닌다는 정신을 바로 와유(臥遊) 사상이라고 일컫는다.
종병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사람이다. 후한(後漢)이 무너지고 위촉오 삼국의 시기를 거쳐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자 중국의 사회·정치적 불안은 가중되었고, 유교 대신에 현학(玄學)이 대두되었다. 현학은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철학을 말하는데, 당시 사람들에게 그다지 정신적 만족을 주지는 못했던 것을 보인다. 사람들은 대신 불교, 도교로 위안을 얻으려고 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예술론에 크게 영향을 끼친 종병의 사상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에는 도교의 영향으로 산수화가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는데, 종병은 과거에 자신이 유람했던 유명한 산을 그려놓고 감상하는 것은 단순히 경치를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산수화는 도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이며, 산수에서 도를 느낄 수 있듯이 산수화 속에서도 이것을 느낄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화가들이 성상을 그리고, 러시아 화가들이 이콘을 그리듯, 그들은 산수화를 그렸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을 이치로 삼는 것은 대비가 잘 이루어졌을 때, 눈 또한 똑같이 반응하고 마음 또한 함께 이해하게 된다. 눈으로 반응하고 마음으로 이해하여 정신을 감응시키면, 정신은 초월하여 이치가 얻어지게 된다. -장언원, 『歷代名畵記』
성인은 도를 체득하여 만물을 감응하고 현자는 마음을 맑게 하여 만상을 음미한다. 산수의경우는 형질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영묘한 의취가 있다. …(중략)…성인은 신으로서 도를 본받고 현자는 세상에 그것을 통용하도록 행한다. 산수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도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인자는 이것을 즐기니, 이 또한 이상적인 경지에 가깝지 않겠는가. -종병 『畵山水序』
종병이 쓴 예술론인 『화산수서』에는 산수화를 통해서 정신을 해방시키고 그것을 통해서 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와유는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당시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산수화의 창작행위를 통해서 자연으로 표상되는 도를 포착하며, 이것을 다시 감상행위를 통해서 그것에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다. 이 시기의 미술은 인물화에서 산수화로 크게 옮아갔는데, 산수화는 와유의 사상을 구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도구였다고 볼 수 있다.
낙향한 사대부들이 고향에 은거하며 그린 산수화는 단순히 산수를 표현한 것만이 아니었다. 산수를 통해서 자연, 나아가 우주를 표현하고 그 원리를 담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작품을 방 안에 걸어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노니는 감상행위를 통해서 무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도 이처럼 그림을 통해서 실재의 풍경을 유람하며 도를 탐구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이러한 와유의 사상은 심신수양을 위한 공간으로서 산수를 바라보고 있는 조선 초기의 관념적인 산수화나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림을 통해서 화가가 표현하려고 했던 사물의 본질을 느끼고 간접적으로 명산을 유람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조선 초기의 관념적인 산수화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와 같은 작품이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에서 잘 드러난다. 꿈 속에서 겪은 이상향의 공간을 그려낸 <몽유도원도>나 물을 보면서 사색에 잠겨 있는 선비의 모습인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15세기>는 자연에 몰입하려는 당시의 관념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관념적인 산수화는 이후 임진왜란 등 사회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자연 속에 칩거하는 모습을 담아내다가, 이후 청나라의 영향으로 실경산수가 등장하게 된다.
실제의 풍경을 그려냈다고 이야기하는 실경산수화는, 반드시 실제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751>나 <박연폭포朴淵瀑布, 17~18세기>는 풍경을 2차원 평면에 담아내려고 한 서양화의 재현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畵帖, 18세기>에서 이러한 특징은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는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한 종이 위에 축약하여 표현함으로써, 이것이 반드시 실제로 본 실경산수가 아닌 실재하는 풍경을 담아낸 실경산수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실경산수 속에서는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풍경이 아니라 한국의 풍경이 드러나 있다. <몽유도원도>가 꿈 속의 환상적 공간을 거니는 것이라면, 실경산수 속에는 직접 유람했던 공간을 그림으로 재현시켜서 다시 한 번 마음을 통해 거닌다는 와유 사상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러한 관념 속에서, 창작자는 단순히 ‘사진을 찍듯이’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을 창작하는 행위는 그 기억을 종이 위에 담아내는 것이며, 감상하는 행위는 그림을 매개로 하여 다시 그 기억 속을 관념적으로 유람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와유의 철학을 통해 관념적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실경산수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시대 이후 한국의 산수화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 화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근현대 시기 한국의 산수화는 서양의 풍경화법과 만나기도 하였다. 서양의 풍경화법과 만난 산수화는, 조선 후기 실경산수화와는 조금 다른 기존 산수화의 소재를 사용한 ‘실재의 풍경’을 재현하려고 했다. 그러다, 21세기부터는 그 기법이나 대상에서 새로운 재료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산수화를 재해석한 작품도 보여지고, 산수 속에 현대풍경을 도입하는 등의 실험이 시도되는 등 변화를 거듭해오면서, 산수화는 현대에서 계속 진화하고 있다.
참고
이종묵 편역, 『누워서 노니는 산수(조선시대 산수유기 걸작선)』, 서울:태학사, 2002
김지연, 「종병의 예술사상의 형성에 대한 연구」(석사학위논문), 홍익대학교, 2010
박영택, 「산수화에 반영된 자연관과 집의 의미」 『한민족문화연구』제22집, 한민족문화학회, 2010
손명란, 「조선시대 산수화에 내재된 와유사상의 시기별 특징 연구」, (석사학위논문), 경희대학교, 2014
오세권, 「2000년대 한국의 ‘퓨전산수화’연구」『기초조형학연구』Vol.10,No.5, 한국기초조형학회,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