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 絵巻)
오랜 세월을 견뎌온 종이는 마치 손을 대면 바스라질 것 같아 보인다. 이제는 빛이 바래고 곳곳에 벗겨진 금색 채색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거의 사라져가는 윤곽들을 자세히 보면 금빛 구름 사이에 헤이안 시대의 가옥이 보이고, 고운발을 마주하고 앉아있는 천년 전 인물들이 떠오른다.
마당에는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집은 거의 무너져가고 있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여인은 한때는 고귀한 신분이었지만 무너져가는 집처럼 몰락하기 일보직전이다. 여인은 과거의 인연을 떠올리며 한숨을 짓는다. 그 여인에게는 과거 자신을 찾아주던 신분 높은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세간의 여인네들처럼 연애를 주고받기에 그녀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지나치게 고지식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남자와 인연을 맺기는 했지만, 남자는 그녀의 촌스러움과 추위에 질린 빨간 딸기코(末赤花, 그녀가 등장하는 ‘스에스무하나’의 챕터 제목이기도 하다)에 질려 떠나버리고 오랫동안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 시대 부모도 없고 마땅한 후원자나 남편도 없는 여인들은 그렇게 몰락할 수 밖에 없다. 그림 속 여인도 마찬가지로 과거 권세있을 당시에 그녀를 모셨던 시녀들은 이제 다 떠나버렸다. 어쩌면 그녀 마저 먹고살기 위해서는 신분낮은 친척의 시녀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한숨을 짓고 있는데 마당 저편에서, 시동에게 등불을 들린 채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바로 과거 이 여인과 인연을 맺었던 남자다.
그림은 바로 이 순간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담아내고 있다. 옛 소설 겐지모노가타리를 그린 두루마리식 이야기 그림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이다.
에마키(絵巻), 혹은 에마키모노(絵巻物)는 원래 두루마리식으로 된 이야기 그림을 말한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85) 이후로 일본의 문학작품들의 주요 부분과 함께 그려진 이 이야기 그림은 대체로 가로로 긴 두루마리 형태인데, 그 두루마리 안에는 이야기와 그에 관한 삽화가 함께 그려져 있다. 글과 함께 우에서 좌로 읽게 되어있는데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서 그림을 배치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가장 오래된 에마키는 735년에 그려졌다고 하며, 현존하는 대부분의 에마키는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의 에마키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소설을 담아낸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 繪卷)>이다. 가장 귀족적인 시대인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에마키에는 특징적인 표현방식이 있다. 후키누키 야다이(吹拔屋臺)라고 하여 마치 조감도의 모습으로 건물을 그려내는 기법이라던가, 히키메 가기하나(引目鉤鼻)라고 가늘고 긴 눈과 갈고리같은 코로 고귀한 신분의 주인공들을 표현한 기법이 바로 그것이다.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에서도 바로 이러한 표현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
겐지모노가타리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소설로 꼽힌다. 794년, 교토에는 새로운 수도 ‘헤이안’이 건설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쇠퇴로 인해 일본에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문물이 줄게 되고, 이로 인해서 국풍문화(國風文化)의 시대가 도래한다. 현재 일본에서 쓰는 가나문자가 만들어져서 사용되었고, 이로 인해서 여성들도 모국어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헤이안 시대에는 여성문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의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11세기)>와 세이 쇼나곤(清少納言)의 일본 최고(最古) 수필집 <마쿠라노소시(枕草子,11세기)>이다.
세이 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가 일기나 비망록의 형식을 한 수필문학인데 만해,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모노가타리는 500첩에 달하는 분량에 4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장편소설이다.
모노가타리(物語)란 흔히 ‘이야기’와 비슷한 의미로, 좁은 의미에서는 겐지모노가타리와 같은 소설문학류를 뜻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일본어에서는 이야기나 설화를 모노가타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겐지모노가타리는 황자(皇子)로 태어나 많은 여인들을 만났던 히카루 겐지(光源氏)와 그의 후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히카루(光)’란 범상치 않은 아름다움과 재능을 가져 뭇 여성들에게 ‘빛나는 님’으로 불리었던 겐지의 별칭이라고 할 수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가 겐지모노가타리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논란이 있다. 수많은 여성들을 만나고 화려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은 불교에 귀의한 주인공을 통해 삶의 무상을 표현하거나, 주인공을 통해서 등장하는 수많은 계층의 여성들의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혹은, 당시 천황과의 결혼을 통해서 권력을 잡았던 후지와라 가문의 딸 쇼시를 모시던 시녀 무라사키 시키부가 세이 쇼나곤이 시녀로 모시던 데이시를 견제하고 천황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 쓴 소설이라는 설도 있다. 어떤 이유로 썼건 간에, 당시의 귀족사회를 잘 알고 있었던 무라사키 시키부의 이 소설은 헤이안 시대의 생활상을 무척이나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겐지를 중심으로 400명이 넘는 인물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각자의 캐릭터와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최초의 소설로써 현재까지도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헤이안 시대로부터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겐지모노가타리는 일본을 비롯하여 세계의 주요 문학작품 중 하나로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 대중문화 속에서는 겐지모노가타리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와 영화, 만화, 소설 등이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각국 언어로도 번역되어, 전 세계의 독자들을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탁월한 이야기로 매료시키고 있다.
겐지모노가타리 에마키와 같이 귀족적인 취향의 에마키모노는 이후 일본 황실과 귀족사회가 정치적으로 몰락함에 따라 쇠퇴하였지만, 이후 문학을 주제로 한 대중미술을 낳았고, 장식적인 표현방식은 이후 17세기 에도시대의 우키요에(浮世繪)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이 우키요에는 반 고흐를 비롯한 인상화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그림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을 서술하는 에마키모노의 스타일이나, 후키누키 야다이(吹拔屋臺)와 같이 과감하게 지붕을 생략하고 벽을 조감도처럼 표현한 표현방식은, 현재 우리가 즐겨읽는 일본 만화책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다.
참고
‘월간미술’-세계미술용어사전 monthlyart.com/encyclopedia
‘도쿠가와박물관’ 웹사이트 www.tokugawa-art-museum.jp
‘고토박물관’ 웹사이트 www.gotoh-museum.or.jp
<A Case Study of Heian Japan Through Art:Japan’s Four Great Emaki>, Jaye Zola, Retired Teacher and Librarian, Boulder Valley Schools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
무라사키 시키부(전용신), 『겐지 이야기』(총3권), 나남, 1999
무라사키 시키부(세토우치 자쿠쵸/김난주), 『겐지 이야기』(총10권), 한길사, 2007
안혜정, 『내가 만난 일본미술 이야기』, 아트북스, 2003
추천사이트
김현정 교수의 알기 쉽고 재미있는 ‘겐지 이야기’ www.nuch.ac.kr/gen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