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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Jun 06. 2016

열정이 없는 삶

그것은 기계적으로 사는 지루하고, 그래서 평범한 삶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괴상하게도 열정이 넘치는 인간이었다.


유치원 학예발표회 때는 백댄서였던 주제에 내 파트너가 짜증을 낼 만큼 혼자 신이 나서 손을 흔들어댔고, 초등학교 시절에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면 내 목표는 체력장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빠르게 할 것인가였고, 그 목표를 위해서 친구들이 비웃을 만큼 실험과 연구를 하곤 했다. 솔직하게 그림도 못 그리면서 중학교 미술시간에는 보스니아 내전을 주제로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드느라 밤을 꼴딱 샜고, 고3 시절에는 수능공부를 하다가 너무 재미있어진 나머지 정작 시험공부는 안하고 참고문헌만 냅다 빌려다 읽어댔다.


나에겐 중도란 없었다. 사회로 나와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 지루해하는 일을 하면서도, 나는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엄청난 의미를 끌어다댔다. 그리고는 내가 하는 일이 인류를 구하기라도 할 듯이 열심히 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했다. 내가 수십년간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싫어하며, 특히 자기네들과 같은 일을 신이 나서 재미있게 하는 인간들을 봐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이나 공부를 할 때는 차분하게, 때로는 하기싫은 데 어쩔수 없이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기싫은 것처럼 느릿느릿 일어나서 '이봐, 난 이것 말고도 할 게 많다고'하는 표정으로 거스름돈을 던져주는 구멍가게 아저씨처럼 말이다.


나는 절대로 그런 구멍가게 아저씨같은 삶을 살지 않으리라고 여겼다. 내가 구멍가게를 하게 된다면 나는 소비자 패턴을 분석하고 물류를 정비하며 열정적으로 경영에 임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열정이 나의 특징이라고 여겼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그것이 바로 나에 대한 나 자신의 정의였다.


그래서, 기자 생활을 할 때면 내가 쓴 기사 하나가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 잡을 것이라고 여겼고, 연구원으로서 에쓰노그래피를 쓸 때는 내가 쓴 이 에쓰노그래피가 진리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누군가를 가르칠 때는 너무너무 신이 나서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했고, 의료봉사를 가서는 장갑도 없이(지금 생각하면 머리가 삐쭉 선다) 피를 닦아냈으며, 전시를 기획할 때는 전시대에 작품을 놓거나 전시해설을 하나 쓰면서도 혼자 전율하면서 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소위 사회인들이 말하는 '철이 들 때'가 되었기 때문인지, 최근의 나는 바로 열정없는 구멍가게 아저씨가 되어버 느낌이었다.


지난 겨울, 나는 지독한 무기력 증상에 시달렸다. 물론 겨울이라 세로토닌 결핍의 영향도 있겠지만 나는 마치 나 자신이 시체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상한 것이 무기력 증상은 다른 분야로 전염된다는 것이다. 일에서의 무기력은 글쓰기로도 이어졌다. 나는 특이한 외국 요리를 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무엇을 먹어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좋은 책을 읽어도, 가슴뛰는 아름다운 문장을 읽어도 나는 종이를 씹어먹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아하던 음악도, 공연도 모두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열정에 넘쳐서 일을 하고, 밤을 새워서 책을 읽고 또 읽고, 발레리나의 감정표현을 보며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전율을 느끼던 내가 사라지자, 이상하게도 나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더 편해졌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연애 이야기, 월급 이야기, 결혼 이야기를 했고, 사람들은 나를 이해할 만한 어떤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열정대신 평범함을 받아들이면서, 삶은 편안해졌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편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들도 한 번씩 이런 과정을 겪고 난뒤 이렇게 '평범함'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닐까.


사실 사회성이 부족한 내가 이 일을 늦게 겪어서 그렇지, 모든 직장인들이 바로 나와 같은 과정을 겪고 난 뒤 저렇게 변한것은 아닐까. 마치 1984년윈스턴이 미친 열정을 버리순간 그에게 편안한 삶이 주어졌듯이,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 사회가 그들을 제대로 된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평범하지만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은 정말로 전혀 없는걸까. 나는 그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잃어버린 내 열정을 아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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