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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Dec 04. 2016

병아리콩은 배신하지 않는다

모든 요리를 망쳐버린 뒤 팔라펠과 후무스로 구원을 얻다  

나에게는 힘겨운 여름이었다.


올해 봄에 건강을 챙기겠노라고 결심하고 거창하게 계획을 세우고 월든 프로젝트라고 이름까지 붙여놓았지만, 그동안의 무절제한 생활와 심한 스트레스는 몸에 흔적으로 남았던 것이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면서 나는 결국 수술을 받았고 수술 후 마취 부작용과 그로 인한 악몽, 그리고 며칠에 한 번씩 오락가락하는 감정기복을 겨우 견디어 냈다.


그렇게 몇 달을 살았다. 그냥 생존했다고 표현해도 되겠다. 악몽으로 잠을 설치다 아침에 겨우 일어나고, 좀비같이 회사를 다니고, 집에서는 하는 일 없이 드라마나 찾아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가 지난 10월에 몸도 정신도 겨우 회복이 되기 시작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 요리를 다시 시작하고 겨우 걷는 것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던 것과 같은 정신상태에서 빠져나올 수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회복이 되었다고 해서 입맛까지 완전히 되찾은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난 10월 이후로 나는 하는 요리마다 죄다 망쳐버렸다. 속된 말로 재료를 다 '때려넣고' 쉽게 만들수있었던 뵈프 부르기뇽에선 토마토의 신맛이 났고, 닭육수에서는 물에 담근 사체 맛이 났으며, 도대체 망칠 수는 없는 감자 수프는 토할것 같은 맛이었다. 닭고기를 넣은 카레도 맛이 없었다. 심지어 이걸 망치는 인간이 존재하리라고 믿지 않았던 스크램블에그까지 망쳐버린 어느 날 아침, 나는 마지막 남은 감자수프를 싱크대에 쏟아버리면서 고기나 달걀이 들어간 요리는 당분간 삼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3년 전 병아리콩이라는 재료를 처음 접하게 되면서 그 맛에 매료된 나는 여름이면 나는 야채를 찍어먹는 후무스를 만들곤 한다. 병아리콩을 한꺼번에 삶아서 후무스를 만들고 나면, 남는 병아리콩을 갈아서 팔라펠을 만들었다. 팔라펠은 병아리콩과 야채, 향신료를 미트볼처럼 만들어서 튀긴 음식이다. 파리에서 팔라펠을 처음 먹어봤을 때, 그때 누가 나에게 팔라펠이 병아리콩으로 만든 거라고 얘기해줬다면 나는 코웃음 치면서 웃기지 말라고 대꾸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병아리콩만 넣고도 그 풍미를 낸다. 놀라울정도로.


나는 삶은 병아리콩을 마늘, 레몬주스(심지어 귀찮아서 파는 레몬 주스로!), 큐민, 대강 만든 타히니와 섞어서 곱게 갈아 후무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남은 병아리콩으로 이번에는 튀기지 않고 오븐에 구워서 팔라펠을 대량을 만들었다. 고기에서 나는 죽음의 맛을 견디기 힘들어서 고기 요리를 연속으로 망쳐버린 나에게 병아리콩은 구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는 병아리콩을 대강 으개어 다진 양파, 큐민 등 재료를 대강 넣고 반죽을 했다. 계량도 하지 않았고, 그냥 손이가는대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냥 먹어도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지는 병아리콩은, 어떻게 만들어도 맛이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하고있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쓰는 작디 작은 오븐을 거의 5시간 넘게 돌려서 대량의 팔라펠을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냉장고와 냉동실에 팔라펠을 잔뜩 쌓아놓은 뒤에야 안심을 했다.



오늘 점심, 나는 타히니 드레싱을 친 샐러드와 팔라펠 퀘사디아를 맛있게 먹었다. 저녁 때는 과일모듬과 함께 당근을 후무스에 찍어먹었다.


모든 요리가 나를 배신하는 와중에, 병아리콩만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팔라펠과 후무스가 결국 내 입맛을 구원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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