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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애리 Mar 12. 2017

프랑스 남자에게 거절하는 방법

이유없이 파리에서 한 달 살기

파리에서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길을 잃는 것이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사를 한 뒤 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 심각한 길치이다. 길치이면서도 나는 무슨 자신감인지 그 좋은 여행앱 하나 깔 생각을 못하고 있었고, 당연한 귀결로 나는 파리에서 어딘가 가려고 하기만 하면 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파리는 관광객인 나에게 길을 잃기에 좋은 도시였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건물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고, 곳곳에는 내가 언젠가 가려고 했던 명소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서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국전쟁 이후 여러 번의 개발을 거치면서 무척이나 짧은 기간동안 형성된 칙칙한 도시경관을 보고 자라났던 나에게, 사실 파리의 거리는 너무 아름다워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인의 불친절함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듯) 길에서 만나는 파리 시민들은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고 다정하게 관광객인 나를 걱정해주었고, 나에게 관광책자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명소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그 결과 한 달 내내 나는 뤽상부르 공원을 가려고 했다가 길을 잃고 팡테옹에 도착하였으며, 박물관을 찾다가 길 구석에 위치한 가슴이 뛰도록 아름다운 공원을 발견했고, 지하철 바로 앞에 있는 미술관을 못보고 그 반대편으로 한참 걸어가다가 인근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현지인을 만나 새로운 박물관을 소개받기도 했다.




마레지구에 있는 한 박물관을 찾아나섰다가 길을 잃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몇 사람을 만나서 길을 물었지만 대부분 나와 같은 관광객이었고, 운좋게 현지 사람을 만났더라도 나는 그들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가다가 또 길을 잃기를 반복하곤 했다. 이럴 때는 포기하고, 걷다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겠지 하는 태평한 마음으로 그냥 발 닫는 대로 길을 걸어가는 게 속편했다. 그렇게 내가 유유자적 산책하듯 걷고 있을 때였다.  


그때 구원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동네 마실을 나온 현지인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뿜어대는 남자였다. 좋게 말하면 보헤미안 예술가 타입, 나쁘게 말하면 물빠진 청바지를 걸친 동네 총각인 그는 나에게 길을 잃었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마레 지구의 역사와 이 곳에 위치한 명소에 대해서 한바탕 늘어놓은 남자는 내가 서툰 프랑스어로 떠듬떠듬 대답을 하자 영어로 바꿔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행 초반이라 영어로 이야기해주는 프랑스인을 만난 게 너무나 반가웠던 나는 그 남자와 길에 서서 한참을 이야기를 하다가 하도 길을 자주 잃어서 포기하고 그냥 걷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적당히 윤색하여, 파리의 거리가 얼마나 걷기에 좋은 곳인지를 칭찬했다.


그 뒤부터는 파리를 여행하는 여성 관관객이 겪는 전형적인 이야기이다.


그 남자는 나에게 진짜 마레 지구를 보여주겠다고 했고 손목을 잡아끄는 그를 따라 한참동안 마레 지구를 같이 헤맸다. 그는 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지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다음에는 당연한 듯 자신의 집에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 내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보며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던 걸 눈치챘으면서도 그를 따라나선게 실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아름다워. 너하고 같이 우리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파리에 온 여자 관광객들은 대다수는 현지 남자들에게 그런 지저분한 추파와 유혹을 겪는다고 한다. 많은 여행기에서 그것은 '파리 남자들은 로맨틱해' 혹은 '내 외모가 프랑스에선 먹히나봐' 정도로 재미있게 포장되기도 했지만, 아다시피 그것은 절대로 로맨틱한 게 아니다. 그런 추파와 유혹은 로맨틱으로 포장된 성폭력이며 성적 대상화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존중할만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그냥 성관계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정말로 제대로 로맨틱한 관계를 기대했다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진 않았을 테니까.


어쨌건 나는 이 남자와 함께 그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문제는 그 남자가 나를 이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터라 안그래도 길치인 내가 여기가 어디인지조차 헷갈리는 장소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그 곳이 큰 교차로였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는 차량 외에는 주위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한 시간동안 빠른 걸음으로 돌아다녀 그냥 도망쳐버리기에 다리가 너무 아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문제이자, 내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남자에게 거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사회 문화적인 관습을 학습하게 된다. 그 중에서 여자들이 익혀야 하는 관습은 이런 것이다: 타인에게 친절해야 한다. 얼굴을 찌푸리거나 거칠게 말하거나 욕설을 내뱉으면 안된다. 그리고 남자의 사랑은 너무나 지고지순하고 귀한 것이라서 거절하면 안되며, 그를 거절하더라도 절대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된다. 특히 남자가 화를 낼지도 모르며 해코지할지도 모르는데(그것은 그 남자의 당연한 권리이므로) 절대로 강하게 말해선 안된다.


우리 세대의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런 사회문화적 관습을 비웃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교육을 받은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겉만 현대 여성이었고,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전근대 여성이 남아있었다. 문제는 이 전근대 여성이 좀 웃기는 방향으로 현대화되어 튀어나온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느 사립박물관에서 일할 때였다. 큰 전시 오프닝이 있었던 날이다. 전날 거의 밤을 샌데다가 아침부터 언론사와 지역 기관장들을 상대한다고 지쳐있었지만, 저녁 때 박물관 직원들만의 뒤풀이를 안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뒤풀이를 하는데 우리 지역에 체류하고 있던 어느 국립박물관 학예사 K의 일행도 어쩌다보니 끼어들었다. 다들 비슷한 나이대였기 때문에 즐겁게 술을 마시며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앉아서 자기 자랑을 떠들고 있던 K가 내 허벅지 위로 손을 올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그가 손을 잘못 짚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잘못 짚은 사람이 다른 사람 허벅지를 손으로 주물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가 크게 불거진 현재였더라면, 나는 그 순간 K가 일하는 국립 박물관과 내가 일하는 사립박물관의 불균형한 권력관계를 떠올렸을 것이고, K가 권위를 이용해서 나를 성추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런 생각보다 술에 취한 K가 나에게 (여성으로서든 친구로서든 간에) 친밀함을 표현하려는 것이구나, 라고 좋게 생각했으며, 어쨌건 기분이 나쁘니까 K의 손을 떼게 만들어야 겠다, 라는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사실 권력관계라고 얘기하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K가 일하는 박물관이 내가 일하던 박물관과 갑을관계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 순간 내가 했던 생각은  K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뒤풀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화를 내거나 그냥 뿌리쳐버리면 K가 부끄러울 테니 배려해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한참을 고민하던 내가 선택한 방법은 좀 웃기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전날 3시간을 자고 하루동일 피곤했던데다가 술도 좀 했던터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K의 손을 내 허벅지에서 떼어내는 대신에 K의 손등에 내 손을 얹고 톡톡 두드리다가 손을 맞잡는 척 하면서 그의 손을 제자리로 내려놓았다.(이렇게 하면 그가 '실수로' 내 허벅지에 손을 거의 5분간 올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게 효과가 없자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는 대신에 그의 허벅지 위에 내 손을 올려서 툭툭 두드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봐, 그 손 안떼면 나도 니 허벅지 주물거릴거야. 우리 갈데까지 가볼까, 이 변태놈아'하는 걸 에둘러서 알릴 수있을거라고 여겼다) 결국 남자가 하는 짓에 반대하면 안되며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외치던 내 안의 전근대 여성은, 비틀린 방법으로 현대에 적응을 해버린 것이다.




파리에서도, 내 안에 숨어있는 뒤틀린 채 현대화된 전근대 여성은 이 프랑스 남자의 집에는 도저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안될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고 싶었지만, 우선은 나에게 마레 지구를 자발적으로 구경시켜준 이 남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또한 도망치기에는 거리에 도와줄만한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길도 모른다. 고민고민을 하다가 나는 결국에는 거절을 못해서 이 남자의 집에 그냥 따라가버릴까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되었는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이 고민의 순간에도 내가 '싫은데요'라고 하는 옵션은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머리 속으로 생각을 짜내던 내 시선에 호텔 건물이 들어왔다. 나는 그 남자에게 화장실을 좀 가야겠다고 말하고는 그 호텔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오려는 그에게 빨리 갔다올게, 라고 말을 남기며 나는 호텔 로비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리고 프런트에 서 있는 호텔 직원에게 뒷문이 있느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놀란 표정으로 왜 그러냐고 묻는 호텔 직원에게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밖에 저 남자가 자기 집에 따라가자고 하는데 나는 정말로 같이 가고 싶지 않다, 이 남자가 저 밖에 서서 날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이 남자는 계속 서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 뒷문이다, 조용히 빠져나가게 뒷문을 좀 안내해줘요, 라고 말이다.


다급한 표정으로 "Sortie(Exit)"를 외치는 내 얼굴과 유리문 너머로 길에 서 있는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호텔 직원이 말했다.


"아가씨, 저 남자가 괴롭혔나요? 경찰을 불러줄까요?"


나는 그 순간 내가 정말 우스운 상황으로 나 자신을 몰아넣은 것을 알았다. 성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르는, 한 시간 전에 만난 남자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뒷문으로 도망치려고 하다니. 게다가 경찰이라니! 나에게 낯선 나라에서 경찰과 마주치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경험이었다.


"아뇨, 저 사람이 괴롭히거나 한 건 아니었어요."


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호텔 직원에게 말했다.


"그냥 저 뒷문으로 나가면 안될까요? 저 사람하고 다시 마주치면, 집에 따라가야 할 것 같은데요."


"싫다고 해요."


내 말에 호텔 직원이 쿨하게 말했다.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고 호텔 직원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같이 가기 싫다고 하면 되잖아요."




내가 평소에 많은 남자들을 거절해야 했을 정도로 절세 미인이거나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였으면 이런 웃기는 상황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김태희같은 외모나 살로메같은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결국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 내 한심한 연애사는 대개 '거절을 할 수 없어서' 사귄 남자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연애 뿐만이 아니다. 나는 거절을 할 줄 몰랐고, 나를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들에게 부탁을 '약탈'당했다. 그 때문에 나는 정작 나를 위한 곳에 쓸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고, 정작 나를 생각해주는 가까운 사람들을 돌보지 못했다. (왜냐면 정말로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은, 나를 생각해주었기 때문에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내 인생을 관통해볼 때 거절을 못하는 것은 정말로 내 인생에 큰 손실을 끼치는 성격이었다.


나는 용기를 짜내 호텔 밖으로 나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네 집에 같이 가고 싶지 않아,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아마도 욕설인듯)를 내뱉더니 인사도 없이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는 나에게 항의하거나 나를 해코지하지는 않았고 그냥 무례하게 떠나버렸을 뿐이다. 나는 해코지를 안당했다는 안도감과(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애초에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에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K와 같은 쓰레기같은 인간이 체면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했던 배려를 씁쓸하게 떠올렸다. K의 성추행과 그를 배려한 나의 역 성추행(?)이 있었던 뒤, 나는 공통된 지인에게 뜬금없고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들었다. "있잖아, K씨는 이미 결혼했어" 지인은 다소 분개한 목소리로, 그러나 나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타이르는 투로 말했다. K는 내가 유부남인 자신을 유혹했다고 떠들고 다녔던 것이다.


나는 그 날 K에게 화를 냈어야 했다. 왜 내 허벅지를 만지냐고 큰 소리로 당당하게 물었어야 했다. 박물관 직원들을 데리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쓰레기 같은 인간의 마음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어차피 생긴대로 행동할 것이므로.


아마, 그 날 내가 만난 호텔 직원은 자신이 했던 말 '싫다고 하면 되잖아요'가 내 인생을 관통하는 어떤 교훈을 던져주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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