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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린 Sep 29. 2021

루틴이 흥분된 뇌를 진정시킨다

10대들에게도 루틴의 힘을 1

 

화를 참고 공부가 가능할까?


  식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아마 음식을 가리던 딸에게 무심코 한 마디 던졌던 것 같은데, 둘째는 순식간에 뾰로통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친구와 조별 발표로 갈등을 겪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는데 아빠의 툭 던지는 말에 화가 난 것이었죠. 그 순간 참았어야 했는데, 속에서 울화통이 터졌는지 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분위기는 일순간 험악해졌죠. 딸은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 모습에 저도 화가 더 폭발했죠. 


  문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식사 후 30분 뒤부터 영어 공부를 봐주던 일이 아득해졌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딸은 영어 독해 연습을 아빠와 함께 해왔습니다.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읽고 번역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어렵거나 틀리는 부분만 바로 잡아주고, 해당 지문의 녹음파일을 재생해주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간 딸이나, 화가 난 아빠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함께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시간이 지나자 둘째가 빼꼼히 방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옵니다. 

  “영어 공부 안 해?”

  “해야지. 이리 와.”

  둘째의 표정은 여전히 짜증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화를 억누르고 옆에 앉습니다. 그러고는 약간의 기계적인 말투로 영어를 읽어가기 시작했죠. 저 역시 속에 있는 불을 간신히 끄고 딸이 읽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 옆에서 누군가 지켜봤다면 부딪히면 곧장 불길이 번질 것같은 위태로운 분위기였죠. 하지만 둘은 현명하게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무사히 시간을 마무리했습니다.   

   

흥분한 뇌를 진정시키는 것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마도 이게 바로 루틴, 혹은 습관의 힘이 아닐까 합니다. 둘째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거의 2년이 넘도록 영어 독해를 아빠랑 연습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느덧 루틴이 되어버렸죠. 그 루틴이 과도하게 흥분한 뇌를 진정시키고 다시 아빠의 방을 두드리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비단 10대들에게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루틴의 힘은 막강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루틴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거나, 배가 딱히 고프지 않아도 때가 되면 끼니를 챙겨 먹는 것, 밤이 되면 졸리지 않아도 잠을 청하는 것, 신호등 앞에서 의식하지 않아도 멈춰 서거나, 사람을 만나면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 것 등은 모두 뇌가 판단하기 이전에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루틴입니다. 우리집 둘째는 식사 후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자동적으로 아빠랑 영어를 공부한다는 루틴 덕에 화를 절제하고 방에 들어왔던 것이죠. 화를 내는 것보다 루틴이 깨지는 게 더 불편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루틴은 하기 싫은 일도 하게 만들고,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그 일을 하도록 만들어줍니다. 하기 싫은 출근, 하기 싫은 공부도 시작만 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수행하게 되지요. 미국 텍사스A&M 대학과 와이오잉 대학의 공통 연구에 따르면 자신만의 루틴이 있는 사람은 루틴이 없는 사람에 비해 생산력과 집중력이 높고 불안을 덜 경험한다고 합니다. 만약 둘째가 루틴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아빠와의 화해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불안에 휩싸여 있을 것이고 영어 공부는 망쳐버리고 말았겠지요. 심할 경우 화를 참지 못한 채 더 큰 갈등을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보니 루틴은 흥분도를 가라앉히고 갈등 상황까지 정리해주는 멋진 도구라고 할 수 있죠.      


루틴은 어떻게 형성될까?


  그럼 루틴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요? 신경과학자들에 의하면 루틴을 가능하게 만드는 뇌의 구조물은 기저핵이라고 합니다. 꽤 어려운 단어네요. 기저핵은 주로 공포와 불안, 그리고 쾌락을 느끼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죠. 또 동기 및 보상체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기저핵 흑질의 신경세포는 도파민을 생성하는데 바로 이것이 쾌락과 보상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특정 경험을 반복할 때, 그 경험이 도파민 분비를 일으켜 쾌락이나 보상을 느끼게 하면 루틴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일종의 조건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둘째가 영어 공부를 하고 난 후에 영어 성적이 좋아진 경험이 생겼다면, 보상회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고, 그것이 계속 반복되면 루틴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교통신호를 지키면 사고가 나지 않는다’, ‘주문을 해야 식사가 제공된다’, ‘아침에 서둘러야 늦지 않는다’ 등이 보상회로라면, 적색신호를 봤을 때 자동적으로 멈춘다거나, 식당에 가서 주문을 먼저 한다거나, 아침 햇살을 보면 서두르는 게 일종의 루틴입니다. 저녁 먹고 30분 지나면 영어공부를 하는 것이 둘째의 루틴인 것처럼 말이죠. 


  따라서 10대들에게 좋은 루틴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야 합니다. 만약 신호를 지키지 않을 때 쾌감을 느끼거나, 게으름을 피웠는데도 보상이 주어지면 오히려 부정적인 루틴이 만들어질 것입니다. 


  둘째가 영어 공부의 루틴이 생겼던 것은 일단 그 시간이 유쾌한 시간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시간 자체가 보상이 되도록 아빠가 최선을 다해 유쾌한 시간이 되도록 만든 것이죠. 어차피 아빠와 딸 사이니까 자존심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망가지는 모습을 자주 연출했습니다. 과장된 표정, 우스꽝스러운 말투를 끼워 넣었더니 둘째의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졌고 공부 시간이 나름 즐거워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꾸준한 칭찬과 보상이 둘째의 루틴을 만들어줬죠. 과하지 않은 간식, 정성 어린 칭찬과 선물은 아주 유익했습니다. 물론 그보다 학교에서 몇 개의 단어를 더 알고 있는 것만으로 딸에게는 긍정적인 보상이 이루어졌죠. 이것이 딸의 루틴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슬기로운 부모생활을 위한 팁!


자녀의 루틴을 점검하세요. 좋지 않은 루틴이 형성되어 있다면,
분명히 부적절한 보상이 주어졌을 겁니다.
어릴 때 밥 안 먹던 아이를 어떻게 했죠?
쫓아다니며 떠먹인다?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린다?
정답은 ‘시간되면 치운다’입니다.
자녀는 ‘시간이 지나면 굶는다’는 걸 깨닫는 거죠.
 부적절한 행동에는 대가를 치러야 잘못된 루틴이 안 생겨요.
보상은 즉각적이고 일관성 있게 주는 게 관건입니다.
마음 속에 부모의 보상 루틴도 만들어 두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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