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고3 담임을 하던 때였습니다. 모의고사가 끝나는 날이었죠. 학생들의 성적이 궁금했던 나는 시험이 끝나면 반드시 채점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학생들이 대부분이 교사의 말에 무조건 따르던 때라 군말 없이 채점을 마치고는 했죠. 하지만 표정은 겨자를 한 움큼이라도 삼킨 듯이 울상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시험을 잘 본 아이보다 못 본 친구가 더 많았기 때문이죠. 지금 와서 고백하건대 정말 잘못 한 일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머리를 쓰느라 고단했던 학생들에게 1분 1초라도 서둘러 쉬게 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시험은 사람을 정말 힘들게 합니다. 몰입과 흥분의 강도가 아주 높죠. 어떤 문제가 출제될지 불안하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는 편도체는 활성화되고 심장과 맥박이 빨라지며 손에 땀이 나기도 합니다. 최악의 경우 문제를 보고 당황해서 머릿속이 하얘지기도 하죠. 뇌의 혈류가 편도체를 과하게 활성화시켜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은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커다란 짐승을 맞닥뜨린 것처럼 우리 뇌는 어서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시험을 잘 치르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평소에 다져진 연습으로 웬만한 문제들을 거의 접한 친구들이죠. 하지만 이 친구들에게도 시험을 치르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때 사람의 뇌에서는 전전두엽이 활성화됩니다. 평소 쌓아두었던 장기기억을 꺼내야 하고, 헷갈리는 다섯 가지 선택지 중에 한 가지를 골라내야 합니다. 1교시 국어. 5개의 선지를 지닌 45개의 문항. 적어도 225번의 판단을 내려야 하죠. 그뿐일까요? 지문을 읽고 이해하는 것도 만만치 않죠. 2교시 수학. 기억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 담겨 있죠. 이어지는 영어와 탐구 시간까지. 200여 개에 가까운 문항들을 해결하고 있노라면 뇌는 거의 탈진 상태에 돌입할 것입니다. 시험을 끝내면 자신도 모르게 멍한 상태가 되고 말죠.
불안과 강박 속에서 시험을 본 학생도, 온전히 몰입해서 시험을 치른 학생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시험을 대충 본 학생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죠.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을 때 온갖 스트레스가 나오고 그것을 몸이 겪어야 하니까요. 자,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채점을 시키고, 점수에 따라 혼까지 냈으니 참으로 인정사정없던 교사였죠.
시험이 끝나면 무조건 쉬게 하는 것이 답입니다. 머리를 푹 쉬게 만들어 주는 것이죠. 물론 상당수 학생들은 PC방으로 향합니다. 뇌를 쉬게 하는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스트레스를 줄인다는 점에서 과하지 않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죠. 운동하고 푹 자는 것도 좋습니다. 자는 동안 머리와 몸을 쉴 수 있으니까요. 가끔 시험에 모든 걸 쏟아부은 학생들이 멍을 때리며 앉아 있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멍하니 있어서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무기력해지지만 않는다면 나쁜 방법이 아닙니다. 뇌를 쉬게 하는 방법이죠.
하버드 대학의 스리니 필레이 박사는 멍 때리기처럼 뭔가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가 사실은 지친 뇌를 회복시켜준다고 말합니다. 우선 멍을 때리면 불안을 느끼는 편도체의 활동이 줄어듭니다. 긴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멍을 때리는 동안 피로에 지친 전전두피질이 서서히 그 기능을 복구하죠. 장기기억이 회복되는 것이지요. 그런 까닭일까요? 시험 때 풀지 못했던 문제들도 시험이 끝나면 종종 풀리는 경우가 있지요.
스리니 필레이 박사는 집중이 곧고 좁은 길을 비추는 빛이라면, 비집중은 멀고 넓은 곳까지 비춰서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집중할 때 보지 못한 것들을 집중하지 않으면 볼 수 있다는 뜻이지요.
부모들 중에는 아이가 집중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으면 뭔가 고민이 있거나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는 합니다. 물론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집중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죠. 그러나 한편으로 멍때리거나, 운동하거나, 아주 잠깐 딴짓을 하는 것은 집중력을 발휘하다 지쳐서 잠시 회복 시간을 가지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간까지 부모가 채근한다면 아이의 편도체는 다시 활성화되고, 오만 가지 짜증으로 나타나겠죠. 그러니 잠시 뇌를 쉬도록 딴짓을 허해주는 아량을 베풀어야 합니다.
요즘 불멍이 한창 유행입니다. 예전부터 캠핑을 갈 때면 으레 참나무 장작으로 불을 피우고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봤지요. 그럼 정신이 일순간 멍해집니다. 마치 명상에라도 잠긴 듯 온갖 잡생각들이 불꽃과 함께 타올라 사라지는 것 같죠. 따뜻한 온기에, 발갛게 타들어 가는 참나무 향, 타닥타닥 숯이 되는 소리까지. 마음의 불안은 서서히 사라지고 봄날 고양이처럼 몸은 나른해집니다. 불안과 경쟁심, 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기대와 욕망도 그 순간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온갖 경쟁과 시험으로 피곤한 나날을 살아가는 10대. 그 친구들에게 가끔은 머리를 푹 쉬게 할 기회를 주는 게 좋겠지요.
어릴 때 그림 퍼즐하던 때를 떠올려 보세요.
조각 하나가 애 먹이더니 나중에 다시 보니 바로 옆에 있던 기억, 다들 있죠?
쉬면 안 보이던 게 보여요.
이제 막 시험 치른 자녀에게 점수 묻지 마세요.
“나 때는~”도 금지입니다. 괜히 짜증만 키우죠.
온종일 게임하며 쉰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차라리 여행을 권하세요.
게임할 때 뇌는 여전히 일하거든요. 도파민 뿜뿜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