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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이라는 풍미

by 에티텔
저 너머 잠시.jpg 이효연, 저 너머 잠시, 아사에 유채, 90.9x72.7cm, 2025

갑자기 1년 전에 읽은 글이 생각났다.


"며칠 지나 쓰던 글에 들어가면 여기저기 산포해 있는 흥분을 맞닥뜨린다. 흥분을 누그러뜨려 살아 있는 호흡으로 전환해 본다. 흥분이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있는 것이 흥분과 다르지 않기에 이것이 쉽지 않다… 흥분은 서툰 도취와 비슷하다. 인상적인 글은 도취에 물든 흥분을 지닌다. 흥분은 글이 진행 중이라는 신호다…. 중략…. 흥분을 누그러뜨려 말의 살아 있는 운동으로 전환해 본다. 이전 글에 들어 있는 흥분을 다독이고 베어내 글을 쓰는 자를 제압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쓰는 자를 제어하는 것이다. 단지 글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은 새로운 흥분으로 어제의 흥분을 대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흥분을 수습하면서 오늘의 길을 간다." - 이수명 <내가 없는 쓰기> 중에서


흥분의 경험은 다양한 각도에서 체험하는 살아있음의 증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전에 몇 달 동안 그린 그림들을 촬영하고 나니 기운이 빠지고 힘이 사라져 한동안 주춤대고 있었다.

in water.jpg 이효연, 우르술라의 집, 아사에 유채, 60.6x72.7cm, 2025

무심히 오늘 아침에 올린 포스팅에 담긴 사진 속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5년쯤 전에 그린 그림이다. 그때와 지금은 5년이라는 시차도 있지만 마음의 얼개도 사뭇 달라져 있다. 그림을 보다가 실소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림에서 내가 무얼 그리는지에 대한 인지가 없어 보이는 색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무얼 보고 그려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일단 그것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나의 진정한 동인이고 그림을 그리게 하는 힘의 출발점이다. 거기까진 좋다. 그림 속에 있는 노랑에 꽂히면 그것이 의자인지 꽃인지, 나뭇잎인지 가리지 않고 그 색을 바르고야 마는 것이 나의 무력한 흥분인 것이다.


30년을 넘게 그리며 사는데 여전히 지치지 않고 충동이 인다는 건 고무적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릴 때 내가 무얼 그렸는지를 이렇게 생긴 노랑뭉치나 파랑 면이 아닌 그것이 재현해 내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일이 글 쓰는 자를 제어하는 일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림도 그리는 자를 제어하는 일로 작동하길 바라고 바란다. 단지 그림이 움직이게 만들고 싶다. 글을 쓸 때 흥분들이 여기저기 산포하듯 그림 속에도 수많은 흥분이 흩어져 있다. 나는 흥분을 누그러뜨려 살아있는 호흡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차라리 흥분을 더 끌어 모으는 건 어떨까 하는 슬픈 농담이 새어 나온다.


거칠게 올라오던 마음의 높낮이를 진정시키는 데 이 글이 역할을 하고 있다. 그야말로 산포 한 흥분을 현장에서 사로잡아 힘을 빼고 살아 있는 호흡으로 전환하는 중이다. 그동안 힘을 모아 그린 그림들을 전시를 앞두고 촬영했고 그와 함께 무너진 긴장감이 나의 감정선을 널뛰게 하였다. 흥분이 그야말로 밀물처럼 들어오는 데 이 글을 쓰면서 나를 붙잡아본다.

밤의 창밖-edit.jpg 이효연, 밤의 창밖, 아사에 유채, 72.7x90.9cm, 2025

그리고 또 약 2주가 지났다. 이젠 작업실이 낯설 만큼 일상과는 조금 다르게 매일 외출을 하고 있다. 전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전시 오프닝이 있었고 어젯밤은 쉬이 잠들지 못할 만큼 흥분들이 몸 안에 흘러 다니고 있었다. 여전히 다음날인 오늘도 아침에 일찍 잠이 깼다. 정신과 몸의 고양된 상태가 흥분일 텐데 그것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다채롭게 체험하고 있다.


가슴이 뛰고 고양되고 살아있는 듯 생기 넘치는 것이 그 순기능이라면 차분히 무엇에 몰입할 수가 없는 고양상태를 만나는 것이 흥분의 힘든 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물의 곳곳에 스며 있는 흥분을 마주하는 일은 살아있음을 알게 하고 젊음과 생명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제어하기 어렵지만 흥분을 좋아한다. 오늘은 작업실에 나와 종종걸음으로 왔다 갔다 하며 의자에 앉지 못한 시간이 두 시간 남짓했다. 의자에 앉기도 힘들 만큼 고양감의 여운이 길었다. 간신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나니 글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또 한 시간 남짓이 필요했다.

흰 그림자.jpg 이효연, 흰 그림자, 아사에 유채, 65.1x90.9cm, 2025

하루하루 흥분을 사용하고 그만큼의 냉각기를 가져야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 당분간은 흥분이 매일 나를 부를 것이고 매일 다른 흥분과 기쁨으로 울렁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흥분감이라는 풍미를 느끼고 통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오늘도 전시장으로 낯선 흥분을 만나러 간다.


<<Macondo>>

이효연 개인전

2025. 4. 11 (Fri). – 5. 1 (Thu)

클램프 갤러리

강남구 양재천로 191/ 월, 화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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