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성당이 하나 있다. 방에서도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가 좋아서 음악을 끄기도 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열두 시에 한 번 여섯 시에 한 번 타종하는 줄 알았다. 어느 날은 열두 시구나 하고 시계를 보있는데 열한 시 오십팔 분이었다. 여섯 시구나 하고 시계를 보면 여섯 시 삼분이고 그랬다. 종은 한 번도 정각에 울린 적 없지만 집에 온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성당의 종소리가 들려. 열두 시에 한번 여섯 시에 한번. 이 어긋남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집과 성당 사이에 시차가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가 메일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이분, 어느 날은 삼분. 집과 성당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장난 같은 움직임을 상상할 수 있었다.
김선오 산문집 <시차노트>에서
기억 하나
글의 맥락과 다른 경험이지만 나도 열두 시와 여섯 시에 울리는 종소리를 녹음하러 교회 앞을 배회하던 경험이 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영상을 만들어 볼 작정이었는데 교회종소리가 필요했다. 성당 종소리와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교회의 쩌렁쩌렁한 종소리를 담아 집으로 갔던 것 같다. 그때 나도 물론 교회 종이 12시 이분에 치는지 5시 57분에 치는지는 확인 한 바가 없다.
기억 둘
다시 생각이 번지점프를 하니 이탈리아의 어느 시골 기차역이다. 나는 삼분이나 사분정도가 아니라 삼십 분 혹은 한 시간이 느리기도 빠르기도 한 기차를 기다리고 놓치면서 입안 가득 불만을 담고 나의 오래전 지나온 여행을 떠올려 본다. 거기에는 지켜지지 않는 시간약속으로 인해 고생했던 여행지에서의 기억과, 그때부터 지금 나이만큼의 시차가 있다. 기억은 종종 예쁘게 퇴색된다는 속성을 감안하더라도 호기심과 두려움이 혼재된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다른 곳을 향하는 생각이 아직도 흐른다는 시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일까? 인용한 글 전문에 보면 단어를 관광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정말 시차라는 단어는 나를 기억여행하게 하니 나 또한 단어를 통해 관광을 한 셈이다.
기억 셋
생각이 한 번 더 점프를 하면 10여 년 전에 그린 그림 속에 숨겨둔 장치로 여행을 한다. 기차역 대합실에 두 개의 시계가 있는데 그 둘이 서로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들에 대한 물음으로 나는 기차역에 시계가 서로 다른 시각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였다. 그림을 무심히 보면 아무런 어색함을 느낄 수 없는 그림인데 자세히 보면 두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앞서 얘기했듯 우리가 의심치 않고 믿고 의지하는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시간인데 그 시간을 알리는 시계가 나와 다른 축에 기준을 두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집 근처 성당 종소리에서 시작한 생각이 프라하의 오래된 기차역사를 배경으로 그린 그림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번지는 동안 우리는 꽤 크고 작은 시차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나라는 존재와 그런 내가 통과해 온 환경은 조금씩 크고 작은 시차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