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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허세, 그리고 무심함

by 에티텔
in water.jpg 이효연, 우르술라의 집, 아사에 유채, 60.6x72.7cm, 2025

자꾸만 잘하고 싶으니까 억지를 쓴다. 억지는 그림을 경직되게 하고, 답답함 안에 가둔다. 잘하려 하면 잘 안 되는 걸 아는데, 그건 머리로만 알고 실천은 늘 어렵다.


그냥 했을 뿐인데 잘된 경우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의 태도는 무심함이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망치지 않으려면 나는 다시 무심해져야 한다. 이미 집착된 마음을 그림에게서 떼어놔야 한다. 집착을 떼는 법을 나는 잘 모르고, 그저 시간을 두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어떤 작가가 소설가와 대화를 나누는 걸 라디오처럼 듣고 있다. 문체가 좋은 작가가 있고 서사가 좋은 작가가 있다는 말이 툭하고 흘러나온다. 그 말을 듣자 망치로 얻어맞은 듯, 나는 그동안 문체에만 몰입해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럼에도 문체를 유려하게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허세일까? 허세 맞을 것이다. 하지만 훌륭한 허세라면 나쁘지 않다. 적어도 지향이 되는 허세라면, 그건 어쩌면 스타일이기도 하니까.


창문을 반쯤 열어 두었다. 어디선가 나는 냄새, 익은 복숭아 같기도 하고 약간은 오래된 종이 같기도 한 기척이 들었다. 바람이 스치고 나는 문득 그동안 너무 빛나는 말들만 고르려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조심조심, 칼날처럼 예리한 문장들을 줄 세워두고 거기 내 마음을 맞추려 했던 건 아닐까.


그림도 그랬다. 무심한 선 하나가 계속 눈에 밟히고 다시 보니 그게 제일 좋았다. 그러니까, 잘하려는 마음이 언제나 나를 작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놓지 못해 작은 방 안에서만 오래 맴돌았던 것이다.

허세라는 말에 문득 웃음이 났다. 나는 그 말이 조금 슬퍼서 오래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은 누가 봐줬으면 하는 마음, 조금 더 예쁘게 조금 더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거라면 그건 허세라기보다 희망 쪽에 가까운 것 아닐까.

250116-19743.jpg 이효연, 좋은 날들, 아사에 유채, 72.7x60.6cm, 2025

오늘은 아무것도 잘하려 하지 않기로 했다. 말이 되든 안 되든 입에 맴도는 단어들을 적어보려 한다. 언젠가 그 말들이 나를 구해줄 것 같은 예감, 그 예감을 오늘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멈칫하는 정도로 나아가고, 멈칫한 자리에서 또 한참을 서성이다 작은 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을 듣는다.


그림이든 글이든, 처음엔 항상 외면처럼 시작되었지만 돌아보면 모두 마음이었다. 마음은 너무 많이 쓸 수도 없고 너무 아껴도 도무지 모양이 안 된다. 나는 오늘, 너무 많이 쓰지도 않고 너무 아끼지도 않기로 한다. 마침내 적당히 마음이 깃든 무심한 선 하나를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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