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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끌리고, 멈추고

by 에티텔
이효연, Orange Road, 아사에 유채, 116.7x91cm, 2024

물감 하나, 빛처럼 스며든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선 하나,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그림은 그렇게 시작되곤 한다. 말로 옮기기 어려운 감정 하나가 가만히 마음을 눌렀고 나는 조심스레 캔버스를 펼쳤다. 붙잡고 싶은 순간, 형체 없는 무언가를 향한 손짓, 그것만으로도 손은 조용히 움직인다. 그 시작은 대체로 순조롭다.


하지만 완성은 다르다. 처음의 마음은 끝까지 함께 가지 않는다. 좋은 장면 몇 개로 끝낼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만 고요히 어울려야 한다. 어느 것 하나도 튀지 않아야, 그래야 나는 비로소 붓을 내려놓는다.


요즘 나는 그 마지막에 자주 머문다. 시작은 단단했고, 마음에 들 만큼 반듯했다. 그러다 문득, 배경의 작은 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슬렸다. 고쳐보았다. 다시 고쳤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래서 걷어냈다. 더 어지러워졌지만, 제대로 걷어낸 후에야 조금은 나아갈 수 있었다. 비로소 정리된 기분, 조금은 후련한 마음.


시작도 어렵고, 끝도 어렵다. 시작은 눈부시다. 사랑의 첫 장면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끝은 다르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을 바라볼 때처럼 낯익고, 조용하고, 기대 없이 닿는 신뢰 같은 것. 그리는 일, 쓰는 일, 사람을 만나는 일, 다 비슷하게 다가온다. 눈부신 무언가에 이끌려가지만, 시간이 흐르면 틈이 보이고, 불협화음이 들린다.


내가 그려온 것들. 모두는 이끌림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많던 설렘은 어디로 갔을까. 지금 남은 건, 조금씩 손봐야 할 마음, 끝내 미련으로 남은 장면들뿐. 그래서 더 아껴야겠다고 생각한다. 완성된 그림들을.


무엇 하나 더 고치고 싶지 않을 때,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무엇 하나 앞으로 나서지 않을 때, 그림은 조용히 완성된다. 좋아서가 아니라,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아서.


완성이란, 커다란 기쁨이 아니라 작은 수긍처럼 찾아온다. 더 손댈 이유가 사라진 순간. 이대로도 괜찮다는, 나직한 확신. 그래서 그리기란, 내 안의 불협화음을 하나씩 지워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처음은 사랑으로
끝은 평온으로

그림은 그렇게 나를 향해
조용히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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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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