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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비명

by 에티텔
240510-12273.jpg 이효연, 예감, 아사에 유채, 72.7x60.6cm, 2024

며칠째, 그림의 진도가 더디다. 작업실엔 아무 소리도 없었고, 붓끝은 물감 위에서 헛돌았다. 그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제스처만 남긴 채, 그림은 계속 망가졌다. 나는 멍하니 캔버스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렸다. 눈부신 비명. 이유 없이 예민한 하루의 입꼬리 같은 단어였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어딘가 정확했다.


나는 하늘을 자주 그린다.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어떤 날은 그것이 현실보다 더 진짜 같았고, 또 어떤 날은 납작한 환영처럼 느껴졌다. 구름은 특히 자주 등장하는 요소였는데, 맑은 날 떠다니는 구름은 이상하게도 손이 가지 않았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런 것들은 어쩐지 그리기에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대신 나는 구름이 가득 찬 날의 하늘을 좋아했다.


복잡하고, 선명하지 않아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하늘. 그런 하늘을 그리고 있다가 문득, 색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구름 사이, 아주 얇게 벌어진 틈 사이로 하늘이 민낯으로 드러났다. 그건 말 그대로 눈부신 비명이었다. 말없이 떠오르는 가장 조용한 절규.


최근 몇 주간 나는 무수히 실패했다. 그리는 일은 점점 직업이 되었고, 그럴수록 마음은 천천히 뒤로 밀려났다.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과 '팔리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이 서로 얽혀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정리가 끝난 줄 알았는데,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사실 정직하게 좋은 그림이 그려졌을 때 경제 상황도 더 나아진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꽤 오랫동안 비명이 쌓이고 있었다는 걸.


다시 결심했다. 이제 정직하게 그려보자고. 작업실 한쪽 구석, ‘실패자들의 공간’이라 불리는 곳에 꾸역꾸역 그리던 캔버스를 밀어 넣었다. 여섯 개쯤 되었을까. 어딘가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그림들이 조용히, 그리고 무겁게 쌓여 있었다. 수업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누구에게 배우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나에게, 끝없이 뭔가를 배우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욕심을 멈출 수 있어서. 그리고 다시, 그 말이 떠올랐다. 눈부신 비명. 조용한 하늘의 틈에서 터져 나오는, 작고도 확실한 진심.



<눈부신 비명>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 작품은 완성이 되지 않아 대신 2024년에 그린 그림 <예감>으로 포스팅한다. 기회가 된다면 그림 <눈부신 비명>에게도 글의 옷을 입혀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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