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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균열

by 에티텔
240122-7733.jpg 이효연, placed, 아사에 유채, 116.7x91cm, 2024

그림은 대개 비슷하게 시작한다. 작은 설렘이 있다. 손끝이 단단해진다. 그 감각은 무엇도 가능하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그림은 종종 그 가능성을 버린다. 어느 순간, 방향은 흐려지고 남는 것은 표면 위의 머뭇거림 뿐이다.


오늘은 오래 덮어두었던 그림을 꺼냈다. 한때 들었던 말이 있다. “열 번 보고, 한 번 그려라.” 그 말의 무게를 예전엔 알지 못했다. 지금은 수긍이 간다. 그림이 끝에 다다를수록, 보는 일과 그리는 일이 하나가 된다는 것.


선을 긋고 색을 놓고 형태를 바꾸었지만 그림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럴 땐 기다린다. 시간이 그림을 바꿀 때가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시간이 아니라 인식이 필요했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깨닫는 일. 완성은 가능했다. 그러나 완성이 곧 의미는 아니다. 묘사만으로 가득한 그림은 자주 침묵한다. 그림이 말하기 위해서는 그린 사람의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오늘은 구도가 틀렸다는 감각이 강했다. 형태를 조금 수정하자 그림이 달라졌다. 때로는 작은 변화가 전체를 바꾼다. 그러나 이번은 표면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를 고치자 다른 모든 것이 흔들렸다. 큰 수술이 필요했다.


저녁이 지나 있었다. 배고픔을 잊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고요했다. 그림도 지쳤을 것이다. 오래 눕혀두고 수술을 견디게 한 것 같은 작은 미안함이 남았다.


그림의 시작은 구도다. 거리 하나, 각도 하나가 전체의 감정을 바꾼다. 처음의 작은 어긋남이 마지막엔 큰 틈이 된다. 기초가 흔들리면 그 위에 쌓인 모든 것이 기울어진다. 정성도 불안을 감추지 못한다. 정답은 없다. 그러나 형과 색, 긴장과 균형에는 인간이 오래 다뤄온 법칙이 있다. 음악의 화음처럼.


내가 바라는 그림은 조용히 마음을 움직이는 장면이다. 그런 장면이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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