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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와 파이프

by 에티텔
자화상.jpg 이효연, 실수의 탑, 종이에 수채, 2005


수압이 약했다.

낡은 수도꼭지에서 물은 실처럼 흘렀다.
싱크대 모서리에 거품이 남았다.

하루가,
헹구다 만 접시처럼 거기 걸려 있었다.


아몬드 하나.
텁텁한 맛이 입천장에 달라붙었다.

관리인은 고개를 저었고
아랫집 노인은 계단을 올라왔다.

벽 너머 뚝딱.

잠시 후
파이프에서 터져 나온 물은 붉었다.
관이 제 속을 비워내듯.


달력엔 결제일이 붉게 그어져 있었다.
나는 어렵게 문자를 보냈다.

경쾌한 답장이 돌아왔다.
일은 아무렇지 않게 풀렸다.


좁은 바, 네 잔 째 에스프레소.
친구의 웃음은 흩어지고

골목 진열대 위
무화과와 치즈가 눈을 스쳤다.


돌아와 양치해도
아몬드 조각은 이 사이에 남아 있었다.

수돗물은 여전히 붉었다.
이내, 맑아졌다.


힘겹게 꺼낸 두 마디 말.
목구멍에 걸린 숙제처럼 매달리다
물살에 씻겨 내려갔다.

붉은 흔적이 가라앉는다.


나는 새 아몬드를 입에 넣는다.
이번에는 향긋했다.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내 안의 불안이 조금씩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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