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롤은 손가락보다 먼저 움직였다.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무엇을 보고 싶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 이미지는 흐르고, 시선은 그 흐름에 잠겼다. 그러다 문득 두 단어가 떠올랐다. 자신감. 그리고 뚜렷함. 두 단어는 이미지가 주는 모호함의 반대 개념처럼 솟아올랐다.
화면 속 그림들은 제각기 말이 없었다. 어떤 건 그저 표면만 남기고 사라졌고, 어떤 건 잔상처럼 어렴풋한 감정을 머무르게 했다. 나는 그 말해지지 않은 것을 읽으려 애썼다. 그러나 침묵은 때때로 말 없음이 아니라, 말하지 않기로 한 태도 같기도 했다.
침묵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다시 '자신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무언가를 명확히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는 상태를 우리는 자신감이라 부른다. 하지만 자신감은 언제나 선명함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차라리 설명되지 않음을 껴안는 어떤 태도는 아닐까.
내일은 친구와 전시를 보러 간다. 엘리스 달튼이라는 작가의 전시. 초대장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빛과 바람의 화가, 엘리스 달튼.”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천천히 읽었다. 익숙한 구조였다. 작가의 이름 앞에 붙는 형용사들. 무언가를 요약하고, 방향을 짚어주는 수식들. 나는 그런 말을 늘 조금 어색하게 느꼈다. 내 이름 앞에 어떤 단어를 붙이는 일, 그건 나를 내가 아닌 누군가의 언어로 설명하는 일 같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또 동시에 이해되었다. 그 말들은 누군가에게는 지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과 “바람”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어떤 관람객은 그 세계로 걸어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것은 어떤 방식의 친절이다. 하지만 그 친절은 방향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을 감춘다.
문득 나의 작업에는 어떤 단어가 어울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어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 방향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내가 쓰는 언어일 것이다.
예전에 들은 말이 있다. 고대 철학자의 말이라 했다.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판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말은 나의 방향키이 되었다. 산만해 보이는 관심들, 널리 흩어진 탐색들, 사실은 모두 하나의 지점을 향하고 있다는 믿음. 나는 그렇게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개인전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작가님만의 도상이 있으면 더 유리하지 않나요?” 나는 고흐를 떠올렸다. 해바라기나 별이 빛나는 밤만으로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건 반복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내가 한 말이 설득력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순간에는 그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가장 정확한 말보다 가장 가까운 생각을 먼저 꺼내 놓는다.
때로 나는 흔들린다. 질문의 화살이 나를 향할 때. 그럴 땐 작업노트를 꺼내 보곤 한다. 자주 적는 단어들, 밑줄 친 구절들, 그 안에서 지나간 나의 목소리를 다시 더듬는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그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다면, 그건 아마 내 안에서 아주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일 것이다.
그 목소리는 작고, 불확실하고, 문장으로는 잘 엮이지 않는다. 나는 안다. 그 모호함 안에서 나는 내게 조금 더 가까워진다는 걸.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 단정한 수식어로는 가려지는 무언가. 나는 그것을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바라본 세상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