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느슨한 덕질

by 에티텔
작업실.jpg 이효연, 작업실, 아사에 돌가루와 유채, 130.3x162cm, 2023

느슨해지고 싶을 때면 나는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묘한 해방감이 있다. 꼭 필요한 책을 찾으려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해내려는 의욕도 없다. 그저, 일과는 상관없는 주제들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다가 눈이 머무는 제목의 책을 빌려오는 일. 그런 느슨한 태도로 고른 책이 생각보다 더 오래 남기도 하고,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오래전에 들었던 인터뷰 영상을 다시 틀어봤다. 그땐 그냥 지나쳤던 말들이 이번엔 다르게 들렸다. 들리지 않았던 부분이 들리는 건, 내 감각이 예민해졌다는 뜻일까, 아니면 둔감해졌다는 뜻일까. 인터뷰이였던 조수용이라는 사람이 책을 냈다고 했고, 나는 그 책을 도서관에서 검색해 봤다. 이미 대출 중이어서 망설임 없이 예약을 걸어 두었다.


중학교 시절 사회 선생님은 “테스”라는 책을 십 대, 서른, 마흔에 한 번씩 꼭 읽으라고 했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런 책이 있다고 믿는 건 어쩌면, 같은 문장을 읽고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경험은 때로 재해석이 되고, 재해석은 어느 틈엔가 지금의 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불과 몇 달 전에 들은 인터뷰였지만, 이번에는 더 많은 것이 들어왔다. 새로운 정보라기보다 내가 이제야 들을 준비가 된 이야기들.

together.jpg 이효연, 함께, 아사에 돌가루와 유채, 53x45.5cm, 2023

10년쯤 전 나는 꾸준히 팟캐스트를 들었었다. B cast, 브랜드를 소개하는 광고 없는 잡지의 팟캐스트도 그중 하나였다.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은 조수용이었고, 박지윤은 진행을 맡았다. 다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소설가 백영옥이 쓴 인터뷰집에서 조수용을 또 만났다. 이쯤 되면 내가 조수용이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후로 또 우연처럼, 혹은 예정된 연쇄처럼, 이번엔 유튜브 채널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최성운의 사고실험이라는 인터뷰 채널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조수용과 박지윤이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느 잡지에선가 발견하고 그들의 연애사를 짐작할 수 있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를 지지하는 나는 조수용이라는 사람의 사적인 서사에까지 가볍게 발을 담근 모양이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예인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다. 정치나 경제는 말할 것도 없다. 뉴스보다 라디오를 듣고, 드라마보다는 오디오북을 틀어놓는다. 내가 관심 가지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쪽일 때가 많다. 소극적인 덕질이랄까. 언젠가 레이더망에 들어온 사람을 조용히 따라가며, 나 혼자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좋아한다. 사생활까지도 그 사람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는, 어딘가 감정 노동스러운 감정 이입.


그렇게 조용한 덕질이 가능한 건, 알고리즘 덕분이다. 기계가 친구나 지인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시대. 그게 조금 섬뜩하면서도,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나도 한때는 팟캐스트를 진행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화가의 책 읽는 정원>. 그 시절 함께 마이크를 잡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이동진, 김중혁, 김영하, 장강명, 요조. 도서 관련 팟캐스트의 르네상스였던 시절, 나는 그 안에서 나름의 열의를 가졌던 것 같다. 이제는 그 열의 대신 백색 소음 같은 음성들을 들으며 작업을 한다. 아무 연관 없는 소리들 속에서, 기묘하게도 균형이 잡힌다. 지나치게 몰입했던 마음을 식히는 데엔, 약간의 무관심이 도움이 된다.

shadowing.jpg 이효연, shadowing, 아사에 돌가루와 유채, 45.5x45.5cm, 2023

기억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나는 아직도 이동진이 ‘빨간 책방’을 하기 전, ‘라디오천국’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던 꼭지를 기억하고, 그보다 두 시간쯤 늦게 들려오던 요조의 새벽 목소리도 기억한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그런 연대기를 나는 왜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는 걸까.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않을 그 마음을 왜 그렇게 꾹꾹 눌러 담는 걸까. 아마도, 알고리즘만 알고 있는 나만의 팬심. 집중력 떨어진 무해한 애정.


예약 걸어둔 책을 내가 손에 쥘 무렵에는, 조수용이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이미 식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덕질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말이다. 시작도 계기도 없고, 끝도 이유도 없다. 다만 나의 느슨한 덕질은 어느 날 또다시 안테나를 높이 치켜올리곤 할 거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14화나로는 안될 것 같을 때